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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추적자' 신혜라, 도로 꼬리곰탕 만든 하수의 덜컥수

 
 
 
드라마 '추적자'에서 연민을 갖게 하는 캐릭터가 신혜라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시청자들은 대체적으로 신혜라를 증오하는 듯한데 이는 아마도 신혜라를 통해서 보이는 모습이 자신의 내면과 닮았다는 그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기에게 이득이 되니까 지지하는 것이면서 마치 개혁의 기수다 뭐다 해서 지지한다며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서회장의 말에 정곡을 찔려서 불편한 것처럼 말이다.
 
신혜라는 서회장을 위해서 일하다가 이용당하고 구팽 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강동윤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권력의 절반을 갖고자 강동윤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아니다,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정치를 하려고 했으나 서회장으로부터 억울하게 쓴 누명 때문에 신혜라 자신의 이름을 걸고는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강동윤에게 접근했고 그 권력의 절반을 차지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강동윤이 아버지를 위해 이발소 건물을 사버렸던게 복수라고 했듯이 신혜라도 그렇게 절반의 권력을 갖는 것이 복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신혜라가 권력을 가진 후에 아버지의 불명예를 벗겨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투명하지만 신혜라에게 그럴 확고한 의지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권력을 갖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희미해졌을수도 있고 권력의 단맛에 취해 자기합리화를 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 아니던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이 두 남녀는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아주 치밀하고 냉철한 이해관계가 평행선을 유지해야 그들의 관계도 지속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이러한 평행선을 깨려고 하는 쪽이 자충수를 두게 되고 결국에는 이용당하고 버려질 수밖에 없는 기이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강동윤은 끝없이 신혜라에게 '내 앞에서 여자가 되려고 하지 마라'고 말하며 평행선을 깨지 않으려고 한다. 강동윤에게 신혜라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대상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강동윤이 서지수와 결혼한 것은 서지수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인한 것이다. 강동윤으로서는 신혜라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두려운게 아니라 그렇게 됨으로써 돈과 권력에의 탐욕을 이어주는 끈인 서지수와 결별하게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끝없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다.
 
둘 중에서 더 엄격하게 이 평행선을 유지해야 할 사람은 강동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약자인 신혜라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만 강동윤을 사랑하게 되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강동윤은 서지수와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이혼이라는 걸 하더라도 신혜라를 선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혜라는 거기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한 채 자충수를 두기 시작한다.
 


 
신혜라가 백홍석의 기자회견에 맞서 서지수에게 자복을 권유한 것이 안타깝게도 자충수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검찰에 출두한 것은 모두가 버릴 수 있는 존재인 신혜라였고 최정우 검사가 일방적으로 시켜준 '꼬리곰탕'만 먹으면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몸통에서 잘려나간 꼬리 신세가 된 신혜라는 휴대폰 동영상을 무기로 또다른 몸통을 이용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신혜라가 휴대폰 동영상을 미끼로 두 몸통을 조종하면서 타협책을 제시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회장에게 유리한 것이지 강동윤이나 신혜라에게도 유리한 것은 아니다. 서회장으로서는 한오그룹의 골치 아픈 설거지를 한꺼번에 해치울 수 있고 서영욱에게 경영권 승계도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으며 강동윤에게서 서지수를 떼어놓기까지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한데 강동윤은 서회장으로부터 모든 것을 조종당하는 허수아비 대통령이 되는 것 외에는 얻을 게 없으며 신혜라 역시도 강동윤의 허수아비 권력을 나눠 갖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데 권력이란 게 나눠 가질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망각하고 있다. 신혜라가 이처럼 자충수를 계속해서 두고 있는 것은 강동윤에의 사랑으로 강동윤에게서 서지수를 떼어놓기만 하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혜라는 결국 하수의 고질인 덜컥수를 두고 만다. 휴대폰 동영상을 서회장에게 덜컥 넘겨버린 것이다. 이것은 쥐고 있던 칼자루를 상대방에게 넘겨주고 스스로 칼날 앞에 서버린 것과 같은 덜컥수였다.
 
최정우 검사가 배기철을 검거하면서 신혜라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하겠다고 통보해 오고 강동윤은 해결해주겠다고 하지만 여의치 않고 신혜라도 그런 동윤을 신뢰할 수 없다. 장병호 변호사가 서회장을 찾아와 배기철 얘기를 꺼내자 신혜라는 당황하며 배기철에게 손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서회장은 강동윤이 신혜라에게 '내 손에 묻은 분가루는 네 손에도 묻어 있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고 장병호 변호사에게 배기철 문제에서 손 떼라고 지시하며 돌려보낸다.
 
결국 다급해진 신혜라는 서회장을 찾아가 검찰 수사를 중단시켜주는 댓가로 휴대폰 동영상을 넘기기로 한다. 갑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게 해줄 무기였던 휴대폰 동영상을 넘긴다면 그 순간 을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바보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신혜라가 이렇게 몰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혜라야, 앞을 잡던 뒤를 잡던 이 줄다리기에서 이기는 사람은 우리다"라고 했던 강동윤의 수를 미처 읽지 못했든가 강동윤에게서 서지수를 떼어내려는 미련한 생각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간과했던 데 있다. 신혜라가 여기서 좀 더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하려 했었다면 여전히 신혜라는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신혜라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다.
 

 
백홍석의 신병이 누구에게 있든 휴대폰 동영상을 신혜라가 틀어 쥐고 있다면 신혜라나 강동윤에게 크게 불리할 건 없다. 법정 살인, 탈옥, 서지수 납치, 강동윤에게 총을 겨누기까지 했던 백홍석의 편에서 기사를 써줄 기자도 없을 테고 백홍석의 말을 믿어줄 대중들도 없을 것이다. 강동윤의 세 치 혀가 위력을 발한다면 백홍석은 또다른 곤경에 빠질 수도 있다. 서회장으로서도 어쨌든 소낙비는 피하고 봐야 할 입장이니 신혜라가 미리 알아서 길 필요는 없는 셈이다.

 
각각의 상황에서 가진 카드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생각했어야 되는데 히든 카드를 미리 보여주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패를 상대방에게 넘겨서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준 상태에서 베팅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생각은 선택지가 있을 때 하는 것'이라는 선택지를 서회장에게 넘겨버렸으니 신혜라는 이제 더 이상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서회장에게 이용당하는 일만 남았다.
 
동영상이 공개돼도 서회장에게는 선택할 카드가 있지만 신혜라에게는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서영욱이 강동윤에 대한 열등감으로 강동윤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 판단해서 동영상을 최정우 검사에게 넘겨버림으로써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서회장이 아니라 신혜라가 된 것이다. 서회장으로서도 기를 쓰고 막아야 할 동영상이었는데 이젠 신혜라가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할 처지로 바뀐 것이다.
 
'휴대폰 찾아오지 못하면 앞으로 요 올 일 없을끼다'라며 노려보는 서회장의 눈빛을 마주보며 곤혹스러워하는 신혜라의 눈빛이 안쓰럽기만 하다. 그래도 노회한 늙은 호랑이 서회장을 상대로 나름 잘 해오던 신혜라가 "우린 버릴 수 있고, 너흰 버려질 수 있고. 혜라야, 그게 너하고 나의 차이야"라던 단순한 사실을 경시하다가 한번의 덜컥수로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너네 아빠, 나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있는데 찾아왔더라. 살려달라고. 제발 자기는 좀 빼내달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쇼핑백 좀 들어달라고. 그 와중에 쇼핑백들고 내 차까지 데려다줬어. 너네 아빠 그렇게 만든 사람 우리 아빠고. 그런데 넌 지금 우리 아빠 밑에서 짖고 있고"라던 서지수의 말 대로 신혜라도 어느새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은 처지에 놓였다. 신혜라에게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특단의 묘책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필사즉생할 것인지 선택할 일만 남은 듯하다.
 
드라마 작가의 성향을 알 수 없으니 다음 내용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욕구를 대리충족시키는 판타지라는 공식에 충실한다면 명확한 권선징악의 구도로 갈 것이나 현실에 충실한다면 강동윤은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