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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 김탁구' 팔봉의 유훈이 감동적인 이유

   
   
   
팔봉은 임종이 가까왔음을 직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붓을 들고 유훈을 썼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김탁구에게 남긴 제 3차 경합 과제였다. 팔봉은 3차 경합의 과제를 구마준에게도 남겼는데 구마준이 발효일지를 훔쳐서 팔봉의 곁을 떠나갈지도 모른다고 예상해서 미리 메모지에 경합의 과제를 써서 넣어 두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은 남을 위하는 맘이요,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빵은 니 자신이 즐기는 마음을 위함이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은 니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들어야 할 빵을 뜻하는 것이다. 이게 너에게 주는 내 마지막 과제니 부디 꼭 지켜주길 바란다."

팔봉의 주관하에 팔봉제빵집에서 치루어졌던 경합에서 나왔던 경합 과제들은 봉빵의 재료와 레시피 찾기였음과 동시에 제빵인으로서의 마음자세를 가르쳐주기 위함이었으나 그 과제들은 끝내 팔봉이 김탁구와 구마준에게 주고 떠난 유훈이 되버린 셈이다.



김탁구는 제빵실에서 팔봉이 남긴 족자를 들고 팔봉의 유훈을 회상하며 오열하고, 구마준은 자기의 방에서 팔봉의 메모지를 발견해서 읽고는 오열한다. 구마준은 팔봉이 자기가 못마땅해서 벌 주려고 일부러 2년 동안이나 팔봉의 곁에 두었던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봐야겠다. 그렇다고 구마준이 팔봉의 진면목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드러난 구마준의 성정을 본다면 아마 팔봉이 김탁구에게도 똑같은 경합 과제를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언제든 표변할 수 있다.

팔봉제빵집이 영업정지를 당함으로써 팔봉이 살아 생전에 문지방 닳도록 들락거리던 사람들조차도 팔봉의 빈소를 찾지 않음으로써 팔봉의 빈소는 썰렁하기만 하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세간의 사람들은 진실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뜬소문일지라도 거기에 있지도 않은 또 다른 말을 보태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것에서 더 희열을 느끼는 것 같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온라인 상에는 익명을 무기삼아 아무데나 함부로 모욕과 욕설을 배설하고 다니는 자들로 넘쳐나는데 이런 자들을 배태시키지 않는다면 온라인은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버리듯이 온라인은 이런 자들이 점령해버리고 말 것이다.

드디어 팔봉의 발인이 시작되는데 팔봉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부고를 늦게 받아 발인날 아침에 시간을 맞춰서 도착한 제빵장인들이 줄지어 서 있다. 제빵장인들은 팔봉의 명복을 빌며 애도하고, 그들에게 왕관과도 같은 빵모자를 벗어 예의를 표하고, 팔봉의 운구행렬이 지나갈 수 있게 길을 열어 고인이 된 팔봉을 진심으로 애도하며 예의를 표한다.



"우리네들은 비록 몇 백원짜리 빵을 만드는 빵쟁이에 불과하지만, 허나 그 빵의 맛을 내기 위해서 평생을 바쳐 온 장인이라는 사실, 절대로 잊지 말거라, 탁구야." 팔봉이 이승을 떠나며 아끼는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훈이다. 이 장면은 정말로 감동스러운 장면이다. 24부는 이 한 장면만 봐도 다 본 거나 진배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울고 다른 사람은 기뻐하는 것이 내가 태어난다는 것이라면,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나는 가만히 있고 다른 사람은 슬퍼하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비극적인 일은 내가 태어날 때 아무도 기뻐해주는 사람이 없고, 내가 죽을 때 아무도 슬퍼해주는 사람이 없는 때가 아닐까. 진정한 빵쟁이들이 뒤늦게라도 찾아 와 팔봉의 운구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눈물 흘려주고 모자를 벗어 애도를 표하며 길을 터 주었으니 비록 팔봉의 장례와 운구행렬은 초라하고 쓸쓸했지만 팔봉의 마지막 가는 길은 가장 화려한 길이었다 하겠다.

팔봉이 평생동안 이루어놓은 명성은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세간의 입방아로 인해 더럽혀졌지만 팔봉이 걸어왔던 일생의 발자취마저 더럽혀진 것은 아니다. "눈 덮인 들판을 지날 때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이는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답설야(踏雪野)'다. '평생에 후회되는 한가지는 하나뿐인 친구 춘배를 그리 떠나보낸 것이고, 그렇게 친구를 잃은 아픔 때문에 더 이상 봉빵을 만들 수 없었고, 이 세상에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팔봉은 함부로 길을 걸어오지 않았고 그러한 팔봉의 발자취는 김탁구와 팔봉의 수하생들에겐 커다란 이정표가 될 것이다.



팔봉이 남기고 간 유훈(遺訓)이 가치가 있고 감동적인 것은 족자나 메모지에 써놓고 간 것과 같은 형식적인 것에 있음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이 팔봉이 한평생 조심스럽게 걸어왔던 발자취에 있음이기 때문이다.

팔봉의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인해 팔봉제빵집 식구들은 황망함과 슬픔에 젖어 있는데 김탁구는 제빵실로 가 3차 경합의 과제가 적힌 족자를 벽에 걸고 신유경이 선물한 모자를 쓰고 활기차게 빵을 만들기 시작한다. 팔봉이 임종하기 전에 김탁구에게 만들어주었던 그대로 따라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제빵집 식구들을 불러 아침 식사를 하라고 소리쳐 부른다.

제빵집 식구들은 김탁구가 만든 빵을 먹으며 너도나도 한마디씩 칭찬을 한다. 허갑수는 '빵이 아주 촉촉하고 보들보들하니 참말로 맛있다'고 하고, 고재복은 '반죽단계에서 발효가 아주 기가 막히게 된 것 같다'고 하고, 양미순은 '간도 제대로고 빵 껍질도 바삭바삭 노릇하게 잘 구워졌고 기공도 고르고 아주 예쁘게 잘 구워졌다'고 하고 조진구는 '이젠 잼이나 크림 없이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고 한다.



양인목은 무뚝뚝한 대장답게 '그러니까 이제는 제법 먹을 수 있는 빵이 됐다는 그 뜻'이라고 하고 오영자는 '먹을만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맛있다'고 거들며 탁구에게 '참으로 맛있다'고 한다. 모두 탁구에게 엄청난 칭찬의 말들이지만 탁구에게 가장 감동적인 칭찬은 "아버지가 만드셨던 빵이랑 참 많이 닮았다"는 오영자의 칭찬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오영자의 이 말은 김탁구의 빵을 먹은 제빵실 식구들 모두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으나 팔봉의 모습이 어른거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김탁구가 가장 감격스러워하게 될 말은 바로 '팔봉이 만든 빵이랑 참 많이 닮았다'는 말일 것이다.


첨(添) ; 2010. 8. 27. 금. 08 : 27

아마도 부고장(訃告狀)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작진들이 팔봉이 죽는다는 스포일러를 흘렸던 이유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