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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제빵왕 김탁구' 팔봉이 남긴 명언

   
   
   
제작진들이 흘린 스포일러대로 팔봉은 23부 방송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미 결과를 알고 보았으니 팔봉의 죽음이 그다지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팔봉이 임종하기 전에 남긴 말은 언급해 볼만한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팔봉은 와병 중에도 봉빵 실연을 준비하는 김탁구에게 봉빵에 들어가는 재료를 말해준다. 그것이 바로 팔봉과 춘배의 레시피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봉빵은 이스트를 최소화하고 무언가를 넣음으로써 이스트가 들어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춘배는 전분을 넣어서 발효가 빨리 되게 했다면 팔봉은 쌀가루를 넣어 충분히 발효되게 함으로써 빵의 풍미와 향을 더 깊게 했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본다면 빵에 쌀가루를 넣어서 발효시켰다는 것은 다소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쌀은 커녕 보리와 옥수수도 풍족하지 못했던 그 당시에 쌀가루를 넣었고 그것을 대통령까지 와서 즐겨먹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드라마다.

춘배는 봉빵 실연장에서 김탁구가 발효시점에 맞춰 꺼낸 반죽의 냄새를 맡고는 팔봉의 레시피임을 알아차리고 놀라며 패배를 직감한다. 구마준의 부탁을 받은 한승재로부터 돈봉투를 받은 고문들이 춘배의 레시피를 선택하는게 오히려 어리둥절하다. 사필귀정으로 팔봉의 제빵명장 타이틀은 유지되게 되고 춘배는 팔봉의 레시피로 만든 빵을 먹어보고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팔봉의 집으로 찾아와 마주치게 된 김탁구에게서 쌀가루라는 것을 전해듣고는 천재적인 후각만 믿고 빨리 성공하려고 달려오느라 인생을 돌아오게 되었다며 모든 욕심이 헛되었다고 한다.



들어가서 팔봉을 보고 가라는 김탁구의 권유에 탁구가 만든 봉빵을 먹은걸로 인사를 대신하겠다며 돌아선다. 누워있는 팔봉은 잘 가라며 인사한다. 이러한 팔봉을 보면 문 밖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不出戶 知天下)는 도덕경의 한구절이 생각나게 한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며 깨끗하게 승복하며 떠나는 춘배와 그런 춘배를 잘 가라고 위로하는 팔봉을 보면 서로가 뿔을 맞대고 밀어붙이다가 지는 쪽은 깨끗하게 등을 돌리고 이긴 쪽은 더 이상의 공격을 멈추는 소싸움이 떠오른다. 패배를 승복하지 못하고 온갖 비열한 수단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기면 그만이라는 한승재와 구마준보다는 차라리 소가 낫다고 할 수 있겠다.

서인숙과 한승재는 팔봉제빵집의 문을 닫게 하기 위해서 비열한 술수를 쓰고 결국 팔봉제빵집은 영업정지를 당하게 된다. 사정을 모르고 남말하기 좋아하는 세간의 사람들은 원래 봉빵도 팔봉의 것이 아니었다느니 이래서 제빵인들이 싸잡아 욕을 먹는다느니 수근거리게 되면서 팔봉이 일생동안 쌓아왔던 명예는 더럽혀지고 만다.



팔봉은 임종이 가까왔음을 깨닫고 붓을 들어 유훈을 쓰고는 김탁구를 불러 제빵실로 가서 빵을 만들며 김탁구에게 빵이 왜 좋으냐고 묻는다. 안에서 나는 따뜻한 냄새가 좋다고 답한 김탁구가 팔봉에게 스승님은 빵이 왜 좋으냐고 묻는데 팔봉은 사람이 먹는 것이니 좋다고 답한다. 그러자 김탁구는 자기도 빵이 좋은 이유를 팔봉이 빵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걸로 바꾸겠다고 대답한다.

김탁구의 언행을 보면 동자교(童子敎)에 나오는 제자거칠척사영불가답(弟子去七尺師影不可踏)이 떠오른다.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칠 척 떨어져서 가야한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는 스승의 그림자마저도 함부로 밟지 않을 만큼 존경해야 한다는 뜻이다. 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스승에게는 본받아야 할 빛과 그렇지 않은 그림자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스승의 빛을 따르되 그림자를 따르지 말라는 것이나 스승의 참모습을 따르되 스승의 명성과 같은 허상을 쫓지 말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김탁구는 팔봉의 명성을 쫓지 않고 참모습을 보고 팔봉의 참뜻을 깨달았기에 진심으로 팔봉을 존경하고 팔봉의 뜻을 따르려고 한다. 그러나 구마준은 팔봉의 헛된 명성만을 쫓았기 때문에 팔봉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기에 한 때 스승이었음에도 '팔봉은 이미 내 머릿속에 없는 양반'이라거나 '팔봉의 명예가 구겨지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라'고 막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만약 드라마가 아닌 현실속에 드라마에서와 같은 인성을 가진 구마준이 존재한다면 죽을 때까지 절대로 이것을 깨닫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팔봉은 김탁구에게 "어차피 인생이란 나쁜 일도 겪고, 슬픈 일도 겪고, 좋은 일도 겪고, 기쁜 일도 겪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차피 인생이란 겪는 것이다. 이 말은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이다. 세상을 나보다 오래 살아낸 사람은 단지 그 사람이 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존경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할만큼 세상을 살아내기란 참으로 힘겹다고 느낄 때가 많다. 팔봉이 종종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던 것과 연관지어보면 어차피 인생이란 겪는 것이지만 겪는 그 순간을 즐길 줄 알아야 훨씬 더 수월하게 겪어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팔봉의 연배는 되어야 그 참뜻을 알만한 말이라 하겠다.

김탁구가 팔봉이 만든 빵이 구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팔봉은 탁구와의 인연을 회상하며 "어차피 인생은 들판에 꽃과 같아서 지고 나면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늘. 그래도 내 인생 끝자락에 너를 만나 참으로 즐거웠구나, 탁구야"라는 독백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다. 다 구워진 빵을 들고 온 김탁구는 팔봉의 임종을 알고는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조용히 팔봉의 손을 잡는다.

팔봉이 임종을 허락한 것은 김탁구였고 김탁구가 자신의 모든 것을 깨닫고 이어받아 더 발전시켜주길 기대하며 세상을 떴다. 뒤이어 팔봉제빵집 식구들과 구일중이 팔봉을 찾으러 왔다가 김탁구의 손을 잡고 임종한 팔봉을 지켜보게 된다. 팔봉은 비록 구마준에게 깨달음을 주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팔봉이 이 정도에서 하차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