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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연이 김유정의 아우라

   
   
   
드라마 '구미호 - 여우누이뎐'에서 연이를 연기했던 김유정양, 어디서 봤나 했더니 MBC 드라마 '동이'에 출연했던 아역배우였다. '동이'와 '여우누이뎐'을 통해서 본 김유정양은 당대 최고라고 할 만큼의 독특한 아우라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김유정양의 아우라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여우누이뎐'에서 섬뜩한 연기로 오히려 구미호보다 더 소름끼치게 만들었던 천호진과 김정난에 대해서 짧게 언급해 본다.

드라마 '여우누이뎐'에서 만신이라는 박수무당으로 출연했던 천호진의 연기는 경악실색하게 할 만큼 끔찍했다. 아편에 중독된 아편쟁이 박수무당의 광기 어린 얼굴을 하고 이기죽거리며 윤두수를 조롱하고 비웃는 만신, 이 장면은 아마도 천호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천호진은 실감나게 연기했다. 드라마 '여우누이뎐'에서 만신은 제작진들이 '시청률 낚기' 용도로만 이용하려고 하는 바람에 최종적으로는 상상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가 되버렸다. 그렇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천호진의 탁월한 역기 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라마 '여우누이뎐'에서 초옥의 어미인 양부인 역을 맡았던 김정난의 연기 또한 경악하고 전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김정난의 연기력이 뒷받침된 양부인은 구미호보다도 더 구미호같은 얼굴을 한 채 구미호보다 더 소름 끼치는 장면을 많이 연출했다. 구미호 역을 맡은 한은정의 연기가 농익은 질펀함이라면 양부인 역을 맡은 김정난의 연기는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잘 절제된 질펀함이라고 표현해보고 싶다.



양부인은 만신이 은거하는 동굴로 찾아 가서 만신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주머니에 든 것이 몸에 닿기만 해도 괴수의 본색이 드러나는 묘약이라 믿고 주머니를 낚아 채 안에 든 가루를 한 움큼 꺼내 만신의 얼굴에 뿌리는데 양부인이 가장 소름이 끼쳤던 때가 바로 이 장면이었다. 이 때에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섬뜩하게 했던 김정난의 연기를 단 두 컷만으로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김정난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김정난의 연기 덕에 드라마 '여우누이뎐'에서 정말로 무서우리만치 섬뜩했던 인물은 구미호보다는 오히려 양부인이었다.

이제 김유정양의 얘기로 넘어가자. 드라마 '여우누이뎐'에서 연이를 연기했던 김유정양, 무더운 여름날 산 속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시청자인 내가 다 안쓰러웠을 정도로 참 많이 고생했다. 그렇게 죽어라 뼈 빠지게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유정양이 연기했던 연이는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윤두수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그로 인해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에 품었던 정규와의 애틋한 사랑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저승길로 가버리고 말았다.



드라마 '여우누이뎐'에서 연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엄청난 모든 사건의 발단은 연이에게서 시작된다. 연이는 구미호가 박영감댁 묘를 파헤치고 꺼내 온 구슬을 팔아서 부상당해 누운 구미호를 치료할 의원을 데려오려고 한다. 구미호는 절대로 안된다고 하고는 구슬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입을 열면 둘 다 위험해지니 구슬과 관련해서는 본 적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걸로 하자며 재차 다짐해서 물으며 약속을 받아낸다.

하지만 연이는 구미호와의 약속을 어기고 혼절한 구미호의 손에서 구슬을 빼내 저잣거리에 들고 나가 팔려고 하게 됨으로써 모든 사건이 줄줄이 엮이게 되버린다. 구슬을 팔려던 잡화점에서 충일 형제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어미 계향에 의해 윤두수의 집으로 끌려가게 되고, 구미호마저 연이를 찾아 윤두수의 집으로 오게 된다. 연이가 구슬을 팔려고 했던 잡화점 주인이 충일에게 모욕을 당한 화풀이로 관아에 고하게 됨으로써 관아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게 된다. 구미호가 어디서든 찾을 수 있게 연이 허리춤에 방울노리개를 채워주고 잠시 그 자리에 있으라고 했음에도 어디선가 나타난 나비를 보고 쫓아가 촐랑대며 방울소리를 냄으로써 마치 초옥이가 연이를 제물로 알아보았다는 빌미를 주게 된다.

윤두수의 집에 눌러앉게 된 후에는 반딧불이를 쫓아 냇가로 갔다가 정규를 만남으로써 이루지 못할 불가능한 사랑을 시작하게 되고, 돌아오는 도중에는 퇴마사를 만나게 되고, 냇가에서 방울노리개를 흘리는 바람에 이를 전해주러 정규가 찾아옴으로써 정규를 마음에 두었던 초옥의 증오를 받게 되고, 초옥에 의해 강제로 여우피를 마시고 사경을 헤매게 되고, 구미호는 연이를 살리기 위해 치명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여우구슬을 사용하게 된다.

마당에서 반딧불이를 보고 정규로 오인하는 바람에 퇴마사가 뿌린 가루를 뒤집어쓰게 됨으로써 구미호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고, 이를 본 구미호는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소간을 구하러 나가지만 거울속에 비친 모습을 본 연이는 충격을 받고 사라지게 된다. 구미호가 소간을 들고 연이를 찾아가 소간을 먹으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거라고 아무리 어르고 달래봐도 나무 위에 올라간 연이는 절대로 먹지 않겠다면서 꿈쩍도 않고 버틴다. 구미호는 뒤쫓아 온 윤두수에게 구미호로 변한 연이의 모습이 들킬까봐 윤두수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절벽에 매달렸다가 추락하게 되는데 그제서야 연이는 소간을 먹고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말도 안되게 그냥 순서대로 길게 늘어 놓았는데 끝내 생명을 잃고 마는 추악한 음모에 휘말리게 된 발단은 연이가 구미호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었고 그 후에도 고비고비마다 구미호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인해서 사정이 더욱 꼬이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연이 자신이었다. 연이는 호기심도 참 많고 지독하게 말도 안 듣고 고집도 센 아이였다. 결과론이지만 애초에 구미호에게 다짐했던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면 고비마다 구미호의 말을 잘 들었다면 끝내 생명을 잃게 되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왕성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절대로 하지 말라는 일은 기어코 해봐야 되고, 절대로 가지 말라는 곳은 기어이 가봐야 되고, 어른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기어코 자기 고집대로 해 보고 가 봐야 직성이 풀리는, 무모하다고 할 만큼의 당돌한 아이. 그러나 살살 눈치나 보면서 버릇없게 구는 밉상스런 아이가 아니라 옹골차고 야무지게 똘망똘망한 아이. 당대에 이러한 역할을 가장 잘 소화해내는 아역배우가 바로 김유정양이다.

김유정양이 드라마 '동이'에서 어린 동이로 출연했을 때에도 지독하게 말을 안 들었다. 당시에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블로그에 기록했던 것을 뒤져보니 "어린 동이는 참 지독하게도 말 안 듣고 무모해보인다. 만약 현실에 내 주위에 이렇게 말 안 듣고 무모한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다면 붙잡아서 아주 혼을 내주고 싶을 정도다"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김유정양의 연기가 실감났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드라마 '여우누이뎐'을 보면 김유정양의 연기 스펙트럼이 드라마 '동이'에서의 연기보다도 훨씬 더 다양해지고 폭 넓어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연예인 생활을 하는게 썩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편이지만 이왕 연예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훌륭한 연기자로 성장해준다면 시청자인 내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다중들의 열광 혹은 비난을 감당해 낼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연기자들이 교만해지거나 좌절하고 중도에서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많은데 어린 연기자들이 그 재능을 꽃 피우게 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사람들과 선배연기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을 것이다. 김유정양이 중도에서 좌절하거나 하지 않고 뛰어난 연기자로 잘 성장해나가길 기원한다.

여우누이뎐'의 결말이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글 서너개는 더 쓰고 싶었는데 드라마의 시놉시스를 언급한 댓글을 보고 나서는 그럴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사실 굉장히 불편해서 '여우누이뎐'과 관련한 글은 더 이상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 무더운 여름날 산 속으로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고생했을 연기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고생이 많았다고 생각되는 김유정양에 대한 이 글만은 꼭 쓰고 싶다. 이 글을 끝으로 이젠 머리속에서 드라마 '여우누이뎐'을 완전히 털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