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여우누이뎐', 구미호 셋과 나무꾼들의 운명

켸켸묵은 전설의 고향 구미호 얘기인가?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이라면 꼭 보라고 권하고 싶은 드라마가 '여우누이뎐'이다. 언제부턴가 TV 프로그램은 여름만 되면 드라마, 오락 할 것 없이 귀신 얘기로 채워지곤 했었다. 여기에 빠짐없이 등장했던 얘기가 구미호였고 이렇게 매년 우려먹다보니 구미호는 식상해졌다. 그러다보니 전설의 고향이 방송되면 그저 계절이 여름이라는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 별다른 관심을 갖게 되지는 않았다.

드라마 '여우누이뎐'은 TV 프로그램의 계절별 패턴을 따르고는 있으나 기존의 구미호 얘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고 내용도 상당히 풍부하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1, 2부 안에 끝내던 기존의 단막극 형식에서 벗어나 16부작이라는 것부터가 차별화된 것인데 작가의 신선한 상상력을 토대로 만들어진 탄탄한 대본이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만들어냈고 드라마에 대한 몰입도를 높임으로써 다음회를 손꼽아 기다리게 만든다.

드라마 '여우누이뎐' 첫 회를 보면 '선녀와 나무꾼' 얘기가 떠오르고 그 후엔 전설속의 구미호와 이 드라마의 원작격이랄 수 있는 '여우누이'가 혼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여우누이뎐'에서 구미호(한은정)는 나무꾼(정은표)이 10년간 구미호의 존재를 발설치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있었으나 10년을 다 채우던 날 밤에 나무꾼이 무용담처럼 구미호 얘기를 꺼냄으로써 10년간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갖은 고생을 견뎌왔던 구미호의 갈망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선녀의 옷을 감추어서 선녀와 결혼을 했으나 애가 셋이 생길때까지 그 사실을 말하지 말았어야 함에도 옷을 보여주었다가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는 '선녀와 나무꾼' 얘기에서 모티브를 따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작가에게 10이란 숫자는 어떤 의미일까? 구미호가 인간이 되는데 필요한 시간이 10년이고 반인반수의 딸인 연(김유정)이 여우기운을 받는데 필요한 시간이 10년이고 윤초옥(서신애)이 잔병치레를 마치고 온전한 인간으로 살 수 있는데 필요한 시간도 10년이다. 예로부터 숫자 100은 '온'이라 했으며 이는 완전하다는 의미였던 것 같은데 작가는 이 완전한 숫자 100을 10으로 줄여놓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여우누이뎐'에 등장하는 구미호는 현재 하나다. 그러나 구미호가 될 운명을 타고 난 둘이 더 있다. 구미호와 나무꾼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수의 연이와 윤두수의 딸인 초옥이 그들이다. 연이는 10년을 살아남으면 여우기운을 받아 구미호가 될 수 있는 반면에 초옥은 10년이 되는 날 연이의 간을 꺼내 먹지 못한다면 구미호로 살아가야 하지만 연이의 간을 꺼내 먹는다면 인간으로 살 수 있게 된다.

연이는 구미호가 되느냐 죽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나 초옥은 구미호가 되느냐 인간이 되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연이를 살리려는 구미호(한은정)의 모정과 초옥을 살리려는 윤두수의 부정이 충돌하는데 구미호를 사랑하게된 윤두수는 초옥의 생명을 살릴 제물이 구미호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혼란스럽다. 윤두수는 초옥이 구미호가 될 운명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지만 병치레가 잦은 초옥을 살릴 수 있다는 박수무당의 사악한 비방에 따르기로 결정한다.

여기서 충격적인 것은 연이가 구미호로 변하는 것은 인간에게 크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지만 만약에 초옥이 구미호로 변하게 된다면 윤두수네 일가는 풍비박산이 나게 될 거라는 것이다. 정말 포악하고 사나운 성질을 가진 채 인간의 형상에 머무르고 있는 구미호가 초옥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연이의 입을 통해서 설명해주었다. 반딧불이에 이끌려 냇가로 가 반딧불이의 향연을 구경하던 연이는 따라 온 정규도령이 물에 빠지자 손을 내밀어 도움을 준다. 그런데 뒤따라 오는 초옥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연이는 황급히 다리 밑으로 몸을 숨기는데 정규 도령이 '무슨 연유로 이러는 것이냐?'고 묻자 연이는 '그냥 숨어야 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초옥이 사람이 되든 구미호가 되든 연이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될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충격적인 나무꾼이 더 있는데 바로 윤두수다. 박수무당 만신은 사악한 비방을 윤두수에게 일러주면서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구미호가 될 초옥은 이런 윤두수를 계속 시험에 들게 하고 초옥의 어미인 양부인(김정난) 또한 윤두수가 첩실로 들인 구미호에 대한 투기심과 구미호 모녀를 미워하는 초옥에 대한 모정에 이끌려 끝없이 윤두수를 자극하는데 과연 윤두수는 시험을 이기고 발설하지 않을 것인가가 이 드라마의 관전포인트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의외로 작가는 이 얘기를 빨리 풀어헤쳐버렸다. 만신과 양부인 그리고 구미호와 약초를 캐러 간 윤두수 모두가 비밀을 발설하는 공범이 되버린 것이다. 비방을 다른 사람도 알게 된 것은 만신의 경고를 빗나간 것인데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흥미진진하다.



드라마 '여우누이뎐'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대체 어떤 충격적인 결말이 숨겨져 있을까'하는 것이다. 드라마 '여우누이뎐'은 사방이 지뢰밭인데 작가는 용케도 지뢰를 밟지 않고 비켜나가고 있다. 이 지뢰가 언제 어디서 어느 정도의 위력으로 터지게 될 지 보는 내내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정말 등골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끔찍한 결말이 시청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연이와 초옥 모두가 상생하는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작가의 상상력이 기대된다.

드라마 '여우누이뎐' 작가의 상상력은 참 신선하다. 구미호가 무덤을 파헤쳐 망자의 저승길 노잣돈으로 넣어둔 보물을 꺼내 팔아 살아간다는 것, 반인반수인 연이에게 여우피는 맹독이라는 것, 그것을 해독하는 것이 소간이라는 것, 반인반수인 연이에게 여우피는 맹독이나 초옥에겐 여우간(여우가 된 연이의 간)이 구미호가 되는 것을 막아주는 치료제라는 것, 그것도 초옥과 같은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태어 난 여우의 간이어야 한다는 것, 사기꾼 돌중을 등장시켜서 동년월일시에 태어 난 아이가 둘 있는데 둘 중 하나는 필히 죽어야 한다고 으름짱을 놓는 것, ......

구미호(한은정)가 만약에 찌질한 나무꾼이 아니라 연모의 마음을 품은 구미호와 그 딸 연이를 위해 목숨을 걸 정도로 듬직한 사내인 천우(서준영)를 만나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구미호는 인간으로 변해 천우와 행복하게 살았을까? 글쎄, 아마 또 다른 인간의 탐욕으로 끝내 구미호는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다.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탐욕 그리고 이기심에 경종을 울리는게 바로 구미호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