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김탁구' 불완전한 사설과 중대한 사건

드라마 '제빵왕김탁구'가 본격적인 제빵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주인공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사설(辭說)을 풀어헤쳐놓았는데 불완전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김탁구(윤시윤)는 엄마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믿는 바람개비 문신을 한 사내를 찾아 헤매다가 팔봉제빵집에서 드디어 바람개비 문신을 한 진구(박성웅)를 만나지만 엄마의 사망소식(실제 사망했는지 또는 차후에 등장할지의 여부는 불분명)을 듣고 절규한다. 그리고는 엄마를 사망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서인숙(전인화)이라 단정하고 각목을 들고 아버지 구일중(전광렬)의 집으로 찾아가 행패를 부리는 것을 상상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이는 불필요했다고 생각된다.

어린 시절의 김탁구는 똑똑하고 예의바른 아이였고 남자의 자존심을 지킬 줄 아는 배짱도 있었다. 엄마를 만나기 위해 거성가를 나섰다가 위험에 처했을 때 팔봉선생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데 이 때의 김탁구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장면 중에 하나다. 그런데 12년 동안 바람개비 문신이란 단서만 가지고 엄마 찾아 삼만리를 한 후의 김탁구는 너무 단순무식해져버렸다. 쉽게 흥분하고 마구 주먹이나 휘두르며 막무가내로 우기고 악쓰기 일쑤다.

김탁구가 왜 이렇게 단순무식한 바보로 변해버렸는지에 대해서 12년 동안 엄마 찾아 삼만리를 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다. 이런 김탁구가 '개코'란 말로 대변할 수 있는 선천적인 재능만 가지고 제빵왕에 오르게 될 거라는 것은 약간 억지스럽다고 본다. 실제 드라마에서도 억지스런 장면이 등장하는데 아래 그림에서 보는것처럼 이미 포장을 끝낸 빵에서 김탁구는 쉰내를 맡고 팔봉제빵집이 곤경에 처할 수도 있을 상황을 예방하게 된다. 입으로 맛을 보아도 쉽게 분간할 수 없는 쉰내를 포장된 빵을 야외에서 본 것 뿐인데도 냄새를 맡았다는 것은 드라마의 극적인 장면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도가 지나쳤다고 본다.



그리고 신유경(유진)의 경우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한국대학교에 과수석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김탁구보다 더 불충분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들고 나온 돈을 길가에서 구걸하는 가족들에게 던져주고 그 가장으로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서 어려운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모자를 받고 꿈이라는걸 갖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신유경은 그 때 받은 모자를 행운의 모자라 여기며 끼고 살았을텐데 모자의 상태는 처음에 받았을 때나 십수년이 지났을 때나 똑같아 보인다. 바로 이 부주의한 모자의 상태가 신유경에 대한 설명의 불충분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구마준(주원), 구자경(최자혜), 구자림(최윤영)의 경우는 얘기가 중단되기 전과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 살았을 것이므로 특별한 설명은 필요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구자경의 경우는 좀 더 이지적이고 완벽한 캐릭터로 바뀌고 구마준의 경우는 좀 덜 이지적이고 불완전한 캐릭터로 바뀌었어야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구마준의 경우 어린 시절의 나약함을 버리고 구일중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왔었을거라고는 해도 구자경과 구마준의 어린 시절에 비하면 현재와 잘 매칭이 되지 않는다.

드라마 '제빵왕김탁구'는 드라마속의 시대가 정확히 언제인지를 추정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신유경이 쓰고 다니는 모자를 보면 '한국대학교 사회학과 84학번'이라 쓰여 있는데 구자림이 회사창립 30주년 기념식에 신유경을 초대해서 서인숙에게 소개할 때 '4년 내내 장학금 놓친 적 없는 엄청 머리 좋은 베스트프렌드'라고 한다. 그리고 신유경과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란 머리띠를 쓰고 있다. 이것은 드라마의 시대가 정확히 전두환 정권이 호헌조치를 발표했던 1987년 4월 13일에서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이었던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했던 그 사이임을 말하고 있다.



"책상을 '탁'치니,'억'하고 죽었다"라는 궤변으로도 유명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쯤부터 경찰은 공중으로 최루탄을 발사해왔던 태도를 버리고 시위대를 직접 겨냥해서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하며 정권의 말기적 현상을 드러낸다. 시위대들의 안면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가는 최루탄은 경악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이 과정에서 이한열이 뒷머리를 정통으로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사경을 헤매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항쟁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해지게 되었고 마침내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던 6.10 민주항쟁을 드라마 '제빵왕김탁구'가 신유경 하나에 의지해서 다루려는 것은 제작진들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그런 신유경도 마침내는 돈과 권력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성으로 변해 김탁구를 이용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 6.10 민주항쟁이란 역사적 사건을 너무 단순하고 안이하게 드라마에 이용하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인권의 파수꾼'이라고 불렸으나 신한국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된 뒤부터는 극단적인 보수성향의 행보를 이어오고 있는 안상수씨같은 사람도 있으니 완전히 무의미하다고만 할 수는 없겠다.

당시 검사로서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이라는 진상을 규명하고, 당직변호사 제도를 제안하여 신설하고 무료 면담함으로써 인권의 파수꾼이라도 불렸던 안상수. 그랬던 안상수가 신한국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된 뒤 보수성향으로 전향하였고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맡은 후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 정권'으로 규정지으며 극단적인 보수성향의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나 수많은 희생의 댓가로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열망을 저버리고 김영삼, 김대중이 서로 분열함으로써 노태우가 어부지리격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 등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6월항쟁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당시 항쟁을 주도했던 386 세대들의 서로 다른 정치행보로 의미가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그 항쟁이 갖는 역사적인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한편 양인목(박상면)은 다시 찾아 온 김탁구를 길들이기 위해 완력으로 내치는데 받아달라는 진구의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빵 만드는 일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고 왜가 이렇게 까다롭게 구냐고 그럴 수 있어. 사람들한테 그래봤자 우린 빵쟁이들에 불과해. 나도 그거 알아. 빵은 나한테 인생이고 신념이고 자부심이다. 내 인생을 걸만큼 가치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단 말이다. 알겠냐? 내가 놈을 받아들이지 않는건 단순히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야. 놈은 빵에 대한 예의가 없어, 그리고 난 그걸 용납 못할 뿐이다."

양인목도 김탁구의 천부적인 재능은 인정하지만 김탁구에게 빵을 대하는 기본자세부터 가르치려는 것 같은데 이는 근면과 상술, 철저한 상혼(商魂)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던 개성상인의 후예인 팔봉선생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리고 팔봉선생은 김탁구가 만든 빵을 보고 '구일중이 보인다'고 말하는데 김탁구와 구마준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난 후에 팔봉선생만이 알고 있다는 제빵기술을 어떤 계기에 의해서 누구에게 전수할지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 외에 김탁구가 팔봉선생과 대화 도중에 '주구장창'이라는 대사를 썼는데 이는 사전에 나오지 않는 말로 주야장천(晝夜長川)으로 쓰는게 맞다. 이런 시청률 높은 드라마에서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는게 바른말 고운말 같은 부류의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고 신경쓰는게 옳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