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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시사현장 사회

이기수 고려대총장, "영광인 줄 알어, 이것들아"

"야야야, 얘네 미친거 아냐? 완전 어이 없어. 고려대가 김연아를 낳은 게 아니라 김연아가 고려대를 선택한거야. 영광인 줄 알어, 이것들아."

이기수 고려대 총장은 김연아에게 얼토당토 않는 고려대 정신을 주입하려 애쓰지 말고 김연아에게서 김연아 정신을 먼저 배우는게 순서일 것 같다. 피겨 불모지인 한국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지만 자기의 꿈을 향해 피땀흘려 노력해서 결국엔 피겨 여왕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겸손함을 잃지 않고 허튼 말은 하지 않는 김연아 정신. 이기수 총장은 김연아의 교육자가 아니라 오히려 김연아에게서 배워야하는 피교육자다.

고려대는 주입식 교육을 하나?

주입식 교육은 중고등학교에서만 문제되는지 알고 있었더니 이기수 총장은 김연아에게 고려대 정신을 팍팍 주입시켰고 그래서 김연아가 고교생 때와 전혀 다른 경기를 했다고 한다. '고대 정신이라는게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차치하고서라도 달랑 편지 한 장으로 고려대 정신을 팍팍 주입시켰고 그 결과물이 세계 피겨선수권대회 우승이라는데 이거야 웃을수도 없고 참 나. 대학에 가서도 주입식 교육을 받아서 고대생들의 학벌주의는 사회에 나와서도 그렇게 유별난건가? 내가 뭐 김연아도 아니고 김연아의 열렬한 팬도 아닌데도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당사자인 김연아는 어떨지가 궁금하긴 하다.

한국의 지도층이라 불리는 자들은 왜 수치스러움을 모를까? 정치계, 관료계, 학계, 언론계 등등 불문하고 한국에서 지도층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서는 도대체가 염치라는걸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총장님, 체통을 좀 지키시죠.





고려대 정신을 주입시키는건 좋은데 총장으로서의 체통은 좀 지켜야하지 않겠는가? 이게 뭐 총장인지 경호원인지 수행비서인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고려대 학생들에게 다 저런 정신으로 대한다면야 뭐라고 하겠는가마는 '귀하신 몸'인 김연아에게만 저런다면 웃기는 일이 아니겠나. 몇 번 등교하지도 않을 것이고 처음으로 등교하는 신입생에게 총장이 직접 학생증까지 챙겨주고 도서관까지 동행해서 책 대출까지도 도와주는 모습은 대학교 총장이 아니라 영락없이 귀하신 몸 영접하는 사신이 아닌가.

김연아는 캐나다에서 계속 훈련을 해 왔고 앞으로도 캐나다에서 생활을 할 것으로 보인다. 달랑 편지 한 장으로 주입시킨다고 고려대 정신이 주입될 것 같지도 않거니와 고려대인들만의 독특한 정서를 알게 될지조차도 의문이다. 김연아는 단지 고려대라는 '네임밸류'를 좇아 고려대 진학을 희망해왔고 그 바램대로 고려대에 진학했을 뿐이다. 총장이라는 자가 수시로 망언을 해대면서 김연아의 가치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고려대 전체의 이미지에도 손상이 가겠지만 무엇보다 고려대를 선택한 김연아마저 본인의 선택에 회의를 느끼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피겨라는게 개인적인 운동이다보니 코치선임비를 비롯한 일체의 비용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김연아가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때까지 관심조차 없던 자들이 김연아 혼자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달랑 걸쳐 놓고 그 밥상을 자기들이 다 차렸다는듯이 헛소리해대는건 이젠 솔직히 짜증스럽고 불쾌하다.

김연아는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한국의 분위기로 본다면 김연아가 만약 2010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엄청난 역풍을 맞을 것 같다. 현재 김연아 본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한 비난이 김연아 본인에게 집중될지도 모른다. 그 때에 가서도 고려대 총장이 면담해주고 고려대 정신 운운하면서 도서관에 동행해줄거라는 감상적인 기대는 버리는게 좋다. 홀로 피겨를 하면서 힘들었을때의 그 초심을 잃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를 해야 한다. 오늘날 김연아에게 벌어지는 이 현상들은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박찬호나 박세리가 성적이 좋지 않았을때 한국인들이 어떻게 했었는지는 가장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나는 김연아의 열렬한 팬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티도 아니다. 김연아의 경기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피겨라는 스포츠를 잘 모르고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이 그 규칙을 알지 못하면 별로 재미가 없는데 피겨라는 종목은 도대체 봐도 뭐가 우아하다는건지 뭐가 잘한다는건지 잘 모르겠다. 피겨 점수에 만점이 없다는 사실조차도 최근에서야 알았을 정도로 나는 피겨에 문외한이다.

글쎄, 지금 김연아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중 대부분이 피겨에 관해서는 나와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그저 한국사람이니까 그 한국사람이 좋은 성적을 거두니까 그래서 좋아하고 열광하는 것일 뿐이라 생각한다. 오늘날 김연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광적인 현상은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스포츠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박찬호, 박세리는 물론 이름도 처음 듣는 하인즈 워드에게까지도 불어닥쳤던 그 망할놈의 스포츠 민족주의. 김연아는 이 스포츠 민족주의에 희생되지 말았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 현재로서는 김연아가 매대회마다 발군의 기량으로 훌륭한 성적을 이어가는 것 밖에는 없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