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주알 고주알/시사현장 사회

희망이란 불을 훔쳐내는 단순한 것일수도 있다

날개를 다친 새. 다친 날개가 회복될 희망이 없다면 선택해야 한다. 굴욕 아니면 죽음. 그러나 그 새는 1%도 안되는 희망을 찾아 굴욕을 선택한다.

희망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고 누구나 희망을 이야기하기는 쉽다. 어쩌면 희망이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이유다. 아무리 실낱같이 작고 희미하더라도 그 희망을 잡기 위해서 사람들은 때론 굴욕을 견뎌내기도 하고 굴종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희망은 지배계층에 의해서 악용되기도 한다. 피지배계층의 굴종을 강요하기도 하고 착취하기도 하며 때론 지배계층의 부패와 비리 그리고 실책을 덮어버리기 위해서 때로는 피지배계층의 반발을 희석시키기 위한 도구로 지배계층은 피지배계층에게 희망을 설파한다.

누군가에게 이 희망이란 절박함 그 자체인데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이 절박한 희망을 악용하고 피지배계층의 눈을 가리는 것이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학습되고 세뇌되어 온 이 희망의 악용. 그러나 이미 누구도 그것을 포기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 그것도 역시 희망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를 이어 세습되는 것은 부와 권력이 아니라 어쩌면 이 희망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 있는 것은 희망이었다. 제우스는 왜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란걸 넣었고 선물로 주었을까? 희망이란 저 당시부터 이미 지배계층에 의해서 악용되어져 왔다는 방증일거다. 희망이란 사람들에게 때론 선물이기도 하지만 때론 너무나도 잔인하고 악랄한 악마의 굴레가 되기도 한다.

희미하다못해 헛되어 보이기까지하는 희망에 목숨걸기보다 차라리 불을 훔쳐내는게 더 합리적인 것은 아닐까? 아니, 불을 훔쳐서 여러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하는 프로메테우스들을 '학습되고 세뇌된 희망'에 사로잡혀 배척하지 않는게 희망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것이 희망이란걸 끝내 판도라의 상자 안에 남겨두려했던 이유중의 하나일수도 있지는 않을까?

희망이란 불을 훔쳐내는 단순한 것일수도 있다. 불을 훔쳐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는 프로메테우스, 그가 어쩌면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메시아일수도 있다.

2009.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