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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김태희, 망가지기보다 캐릭터를 창조해야 할 때




김태희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은 '얼굴도 예쁜데다 학벌까지도 좋은' 김태희란 배우가 연기라는 걸 하는 동안에는 어쩌면 숙명처럼 계속 따라붙을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이러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끝낼 사람은 김태희 본인 밖에는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김태희는 연기력 논란 종결자가 아니라 먼저 망언 종결자를 선택했다.

현재 출연중인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 제작발표회에서 연기력 논란과 관련해 '잘 생긴 외모 때문에 손해보는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외모를 가졌잖아요"라고 대답했단다. 또한 설사를 참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극중에서 설사 참는 연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삼십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어떻게 이런 경험이 한번도 없었을 수가 있었는지 마치 희귀한 천연기념물을 보는 것 같다.

어쨌거나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김태희가 망언 종결자를 선택했던 것은 연기력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드라마가 시작되자 김태희의 연기력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고 시청자들의 반응 또한 센세이셔널했다.

특히 그동안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던진 김태희의 망가지는 연기에 시청자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난 '망가지는'이란 말이 김태희가 가진 기존의 이미지에서 나온 선입견 정도라고 봤었으나 설사를 참아본 경험이 없었다는 기사를 보고 나니 '망가진' 연기라는 세간의 말에 더는 이의를 달 수가 없게 되었다.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를 보다가 보면 이 드라마는 마치 김태희의 연기 교습을 위해서 제작되어진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 때가 있다. 이 드라마에는 김태희의 말에 따르자면 김태희가 살아오면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연기하기 힘들었을 장면들 투성이다.

공주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났는데 박해영이 찾아와 연장근무를 요청하자 시간이 없다며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시간당 10만원을 주겠다는 박해영의 제안에 태도를 급변해 방긋거리며 애교를 부리고, 백화점에서 거금 6백만원을 일시불로 지불하고 반지를 산 박해영을 뒤쫓아가 상품권을 타게 영수증을 달라고 조르고, 울어서 마스카라가 시커멓게 번져 팬더곰처럼 변하고, 설사를 참느라 다리를 꼬고 땀을 뻘뻘 흘리다가 명품백에 볼 일을 보겠다고 박해영을 협박하고, 방귀를 뀌고는 당황하고, ......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에서 김태희는 울고 웃는 것은 기본이고 주사에 푼수까지 다양한 연기를 해야 한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김태희의 다양한 모습은 꽤나 낯설지만 그런만큼 친근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아마도 김태희의 이런 의외의 친근한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더 인상깊게 받아들여졌던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회가 지날수록 김태희의 연기는 자연스럽지 않고 디테일하지 못하다. 이설은 평면적인 인물로 보일 뿐이고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는 입체적인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상적인 부분을 모아서 조합해보면 전체적으로는 썩 조화되지 않아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몽타쥬와 같이 느껴진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는 높으나 캐릭터를 연기자만의 색깔로 만들어내는 창조력은 부족한 것 같다.

망가지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환호하자 김태희는 망가지는 연기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고 시청자들의 반응을 의식하는듯한 연기를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병원에서의 연기를 들 수 있겠는데 무언가를 의식하는 것은 연기가 아니고 시청자들에게는 금방 식상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는 김태희가 아직 이설 캐릭터를 완전히 김태희의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궁으로 들어간 후의 이설은 단순히 울고 웃는 푼수데기가 아닌 복합적인 캐릭터로서 디테일한 내면연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배역이다. 궁으로 들어온 지금의 이설은 답답하고 한심한데 이는 각각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주지 못하는 김태희의 연기력의 문제로 보인다. 디테일이 부족하니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워져 힘이 없어진다.



드라마 중에서 이설이 미실 흉내를 내며 미실을 롤모델로 삼는다는 장면이 나왔는데 김태희의 경우 누군가를 흉내내기보다는 김태희만의 캐릭터를 창조해내는게 더 낫다. 김태희만의 캐릭터를 창조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연기를 하더라도 그 캐릭터는 죽은 캐릭터가 되버린다.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는 스토리가 별로 대단해보이지 않는다. 단지 김태희란 배우와 이설이란 공주가 보여주는 비주얼이 있기 때문에 보게 되는 드라마다. 또한 이미 드라마의 대략적인 내용이나 갈등구도와 그 해법에 대한 단서가 모두 제시되었고 향후 스토리 전개도 상당 부분 예측이 가능한 범위 내에 들어와 있다. 이젠 김태희의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아 드라마를 끌어가지 못한다면 드라마의 재미는 반감되고 김태희의 연기력에 대한 혹평은 더 거세질 수도 있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보면 어떤 연기자가 그 작품을 통해 마침내 연기에 눈을 뜬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김태희에게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가 연기에 눈을 뜬 작품인 것 같다는 처음의 생각은 조금씩 지나면서 현재로서는 반반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남아 있는 방송은 많은데 망가지는 것을 의식하는듯한 어색한 연기보다는 입체적인 이설을 창조해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