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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고현정과 서혜림은 독배를 권하는 작부(酌婦)



드라마 '대물'에서 민우당이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강행처리함으로써 정국이 얼어붙고 국민정서 또한 정치혐오로까지 치닫는다. 이에 강태산이 국민들의 오해도 풀고 해명하겠다고 TV 토론을 마련한다. 그러나 강태산의 속셈을 알아차린 조배호가 강태산 대신 서혜림을 민우당 패널로 추천함으로써 서혜림이 참가하게 된다. 서혜림은 강태산의 지시를 받은 왕보좌관이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연습을 하지만 TV 토론에서 사회자의 질문을 받고는 배운대로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게 된다.

맞습니다. 우리 정치 바꿔야 합니다. 정치인들부터 몸을 낮추고 겸허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회 개원한지 6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정치인들이 정치개혁의 꿈을 품고 국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분들이 나중에 기성 정치인이 되고 권력의 중심을 차지했지만 구태의연한 정치 현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당 지도부 눈치를 살피며 개인의 소신을 굽힐 수 밖에 없고 권력의 그늘에 머물러야 정치생명이 보장되는 불행한 현실에서 세대교체를 한다고 혈세로 지은 신성한 국회가 날치기 현장이 되는 비극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전 뽀로롱 언니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약속 잘 지키는 어린이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그것도...... 우리 아이들이 무얼 배울까요?

정치인들은 선거때마다 표를 얻기 위해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감히 고백합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진정으로 존경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섬기지 않고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는데는 국민 여러분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썩었다고 손가락질하고 조롱하고 수수방관하실 때 정치인은 국민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워하는 사람이 없으니 부정비리를 저지르고 나라의 장래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우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게 됩니다.

국민 여러분이 대한민국 주인이십니다. 국민 여러분이 정치인을 키워준 부모님이십니다. 부모는 아이가 말 안들을때 타이르고 그래도 안 되면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만이 이 나라 정치의 희망이십니다.

국민 여러분 회초리를 들어주세요. 말 안 듣는 정치인들에겐 사랑의 회초리를 때리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치인들 종아리에 회초리를 쳐서 국민들을 표 찍어주는 사람으로만 아는 오만불손한 버르장머리를 타이르고 가르치고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셔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회초리로 이 나라 정치를 바로잡아 주십시오.




아래는 드라마 '대물'에서 서혜림 역을 맡았던 고현정이 S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후 밝힌 수상소감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다들 저만큼 기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저 오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저희가 드라마를 만들고 연기를 하고 모든 스탭들이 작업에 참여할 때 그 결과물이나 그 과정이나 그게 참 아름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근데, 그 과정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이 배우가 어떠네 저 배우가 어떠네 하면서 시청률 가지고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SBS에서 일을 하든, MBC에서 연기를 하든, 어디서 연기를 하든 배우가 연기를 할 때는 그 순간 진심을 가지고 연기를 합니다. 그게 좋은 대본이든 누가 어떻든 뭘하든 그런 거랑 상관 없이 그 순간 저희는 최선을 다 하거든요.


상기한 서혜림과 고현정의 발언은 단지 할 말을 한 것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한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드라마 '대물'의 극중 서혜림은 팬카페까지 생길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은 역시 고현정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수상소감을 본 시청자들은 무례하다거나 오만하다거나 거만하다거나 등으로 비난을 쏟아냈다.

이렇게 상반된 반응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서혜림의 말이나 고현정의 말을 잘 보면 둘 다 시청자에게 훈계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고현정의 발언은 신중하지 못한 언어선택으로 의도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개연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현정이 시청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서혜림과는 달리 시청자들의 자부심을 직접적으로 건드려 시청자들이 모욕감을 갖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시청자를 건드리는 사람은 곧 오만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일종의 공식과도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다.

방송이 즉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금기시하는 게 있다. 그건 바로 절대로 시청자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막장 드라마의 시청률이 높은 이유를 분석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자. 만약에 여기서 시청자들의 수준이 낮아서 막장 드라마만 골라서 시청하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시청자에게서 찾았다면 아마도 그 프로그램의 인터넷 게시판은 한동안은 닫아두어야 할 것이다. 이 원인 분석이 틀린 것은 아님에도 거개의 시청자들은 용납하려고 들지 않을 거다.

방송의 즉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우선적인 목표는 시청자를 길들이는 것이다. 방송은 그것이 생긴 이래로 시청자를 길들여왔고 태어나면서부터 방송에 노출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방송에 길들여져왔다. 시청자를 길들이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게 될까? 방송의 내용 중에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있어 그에 대한 비판을 하면 잘 길들여진 시청자들이 스스로 앞장서서 방송을 두둔하고 나선다. 방송은 가만히 있는데 잘 길들여진 시청자들이 알아서 방송이 대놓고 하지 못하는 욕설까지도 친절하게 대신해주고 돌아다니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시청자가 길들여졌다는 것은 방송의 내용과 동일시하게 되고 방송 내용의 일부라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게 되면 길들여진 시청자들은 방송에 대한 비판을 자기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고 모욕감을 갖게 되어 참을 수 없어지는 것이다. 방송을 비판하는데 모욕감을 갖는 시청자를 많이 확보하게 된다면 그 방송은 왠만한 무리수를 두더라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게 된다.

정치꾼들의 우선적인 목표도 국민을 길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득이나 이념 등을 앞세워 편을 갈라 놓으며 국민들을 길들인다. 길들여진 국민들을 많이 확보할수록 정치꾼들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국민들을 속일 수 있다. 정치꾼들이 왠만한 무리수를 두어도 길들여진 국민들이 알아서 방어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정치꾼들에게 가장 좋은 파트너는 방송이다. 방송은 정치꾼들의 무리수를 희석시켜주고 그 댓가로 정치꾼들은 방송에 이득을 안겨준다.

방송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전달하며 그 책임을 정치꾼들이나 공무원 기업 등에게 전가하며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방송이 정치꾼들을 비난하면 국민들은 방송 편에 서서 정치꾼들을 비난하고 정치꾼들에 대한 불신을 넘어 혐오하게 된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걸로 끝이다. 국민들이 하고 싶은 말을 방송이 대신해 주니 국민들은 그것으로 불만을 대리충족하게 되므로 '정치란 게 원래 그런 거지'라고 자위하며 포기하고 만다. 난장판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서혜림의 발언이 바로 이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시청자들을 대신해 통렬하게 꼬집어 줌으로써 시청자들이 쾌감을 느끼게 만든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이 통쾌함만 느끼고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갖고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면 한국의 정치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방송과 정치가 합작해서 잘 연출한 각본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서혜림의 회초리 연설은 경우에 따라서는 독배를 권하는 작부가 될 수도 있다.

서혜림이 독배를 권하는 작부였다는 것은 우연스럽게도 고현정이 입증했던 것 같다. 드라마 '대물'에 나오는 서혜림은 국민들의 작은 비판이라도 무시하지 않는 캐릭터였다. 국가재정법을 강행통과하는 과정에서 난장판이 된 회의장을 청소하는 인부들이 육두문자를 섞어서 국회의원들을 욕하는 것을 듣고는 '국민의 혈세로 지은 국회에서 이렇게 난동을 부린 거 국회의원의 한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허리를 숙여 사죄하기도 한다.

그런 서혜림을 연기했던 고현정이 시청자들을 향해 배우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국회의원들한테 국민은 선거 때 찍어주는 한표 두표 표 밖에 안되는 겁니까'라고 했던 서혜림이 '배우들한테 시청자는 출연하는 작품의 시청률을 올려주는 한표 두표 표 밖에 안된다'고 얘기한 것이다. 고현정의 발언이 문제라면 바로 이 부분들에 대한 착오였다고 할 수 있다. 배우들이 시청자들을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시청자들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방송의 화려한 편집기술에 길들여지고 휘둘려 그 안에 독이 들었는지 약이 들었는지 알아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방송은 시청자를 바보로 만드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서혜림에게서 통쾌함을 느끼고 국민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서혜림이야말로 독배를 권하며 시청자들을 잘 길들여준 작부였다고 할 것이다. 또한 고현정이 잔에 독이 들었는지 약이 들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며 시청자들의 권리인 비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시청자들에게 독배를 권하는 작부 역할을 하는 배우임을 망각한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