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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시크릿가든' 살인자가 싫어서 산으로 보냈나?




작가들에게 특히 방송작가들에게 급작스런 교통사고나 기억상실 등은 일종의 만병통치약 정도로 각인되는 모양이다. 시청률을 담보하기엔 극적인 사고와 기억상실 같은 자극적인 설정보다 나은 게 없다는 다년간의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일수도 있겠다. 그로 인해 드라마의 시청률은 담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드라마의 퀄리티는 오히려 떨어지고 만다.

영화촬영 중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뇌사상태에 빠진 길라임을 회생시켜 내기 위해 작가가 풀어내 놓은 해법은 좀 실망스럽다. 아무리 영혼이 뒤바뀐다든가 선몽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너무 우스꽝스럽게 각색해냈다.

지난 글에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사람과 영혼이 바뀌면 멀쩡한 사람의 육체에 들어온 의식불명의 영혼은 멀쩡해지고, 의식불명의 육체에 들어간 멀쩡한 사람의 영혼은 육체를 따라 죽어간다는 설정은 좀 우스울 것 같다'고 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솔직히 이보다 더 웃기는 것이었던 것 같다. 돈 세탁하는 것도 아니고 몇 번의 과정을 더 거친다고 해서 더 달라질 게 있을까 싶은데 하여튼 그렇게 해서 의사의 선언만 남은 상태의 죽은 사람을 감쪽같이 살려냈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길라임에게 의사들은 이미 뇌사 상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했다. 이럴 때 의사의 소견과는 다른 결과가 생기는 경우도 없지는 않고 그런 경우를 흔히 기적이라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설사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포기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서 달밤에 운동장으로 달려나가 체조하는 일까지는 할 수가 없다.

김주원은 뇌사 상태인 길라임과 영혼을 바꾸기 위해 주변정리를 한다. 그리고 길라임을 차에 태우고 비가 온다고 예보된 곳으로 가 천둥 번개가 치는 빗 속을 향해 달려간다. 비를 맞았으니 두 사람의 영혼은 당연히 서로 뒤바뀌었고 둘 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된다. 얼마 지나 김주원의 몸을 빈 길라임은 의식을 회복하지만 길라임의 몸을 빈 김주원은 의식불명 상태 그대로다.

영혼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뇌사상태인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같이 뇌사상태에 빠지고, 뇌사상태에 빠졌던 사람의 영혼이 멀쩡한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얘기다. 이 부분은 내가 지난 글을 통해 좀 웃기는 거라고 얘기했던 것과 같은 결과다.

아마도 이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어떻게 풀어낼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음인지 여기에 길라임 아버지를 매개체로 등장시켰다. 임아영이 길라임에게 들려줬던 꿈 속의 이야기와 똑같은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길라임의 아버지는 '처음 만난 사람들의 악수 같은' 마법은 끝났으니 '이제 진짜 마법을 부려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길라임 아버지가 말하는 진짜 마법은 뒷북이라고 하겠다.



길라임 아버지가 말하는 진짜 마법이란 아마도 김주원과 길라임의 진실한 사랑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길라임과 김주원은 자기를 버리면서도 지켜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마법의 시작이고 끝이라는 술을 매개로 시작된 길라임 아버지의 마법은 이미 진짜 마법으로 발전한 상태였는데 진짜 마법을 부려보라고 말하는 것은 뒷북치는 격이다.

그러한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김주원의 기억상실이다. 김주원과 길라임은 각각의 꿈 속에서 길라임의 아버지가 권하는 꽃술을 마시자 마법이 끝나 둘의 영혼은 제 자리를 찾아간다. 꿈에서 깨어나자 김주원은 21살에 당했던 엘리베이터 사고에 대한 기억은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사고를 당한 그 이후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아마도 그 이후의 기억은 길라임이 매개가 되어 살려낼 것으로 보이고 그렇게 또 진짜 마법이 시작될 것이다. 이건 김주원의 기억찾기가 진짜 마법이 되는 셈이고, 21살 엘리베이터 사고를 기점으로 김주원에게 닥친 두 번의 기억상실은 만병통치약이 되는 셈이다. 무려 13년 동안에 걸쳐 벌어진, 그것도 성인이 된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현재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신기하게 생각하기까지 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김주원은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더 웃기는 건 길라임의 경우다. 길라임은 자동차 사고로 커다란 신체적 손상을 입고 그로 인해 뇌사 상태에 빠질 정도로 뇌손상을 입었다. 그랬던 길라임이 단지 김주원과 영혼이 바뀌었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정신이 멀쩡한 것은 물론이고 의식이 들자마자 주사 바늘을 빼고는 김주원에게 달려갈 정도로 신체도 멀쩡해졌다.



드라마의 내용은 성능 좋던 배가 갑자기 산으로 가버린 듯하다.

지난 2일 김은숙 작가는 자신의 트위터에 "왜 자꾸 절 살인자로 만드시는지 모르겠네요ㅠㅠ"라는 글을 게재하며 해명에 나섰다. 길라임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는 진행될 드라마의 내용에 대한 기사가 나오자 이를 해명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기사를 두고 기자가 악의적으로 드라마의 대본을 유출한 것으로써 기자들의 양심의 문제로 몰아가는 의견들도 있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고 나니 왠지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흘린 스포일러였다는 생각도 든다.

살인자로 만들지 말라던 작가의 말은 결국 실현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살인자가 되기 싫다던 작가가 선택한 것은 드라마를 산으로 보내버리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드라마의 결말을 두고 많은 설왕설래가 오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걸 두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표현할 수는 없겠고 풀어내기 난감했던 부분들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그만큼 많았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