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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엔터테인먼트

이게 다 '키 큰 여자' 때문이다

전철 갈아타는 역에서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빨리 움직이기 위해서 나는 열차에서 내리면 갈아타는 통로와 최단거리로 연결되는 칸에 탔다. 열차가 정차한 후 열차에서 내려서 사람들보다 앞서 가기 위해 평상시보다 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바로 앞에 키 큰 여성이 걸어가고 있었다. 굽 없는 구두를 신었는데 발 끝이 약간 벌어지는 팔자걸음에 가까운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걷는데 얼핏 봐도 키가 참 커보인다. 나도 느린 걸음은 아니기에 그 여성을 앞지르게 되었다. 내 키가 175가 조금 안되는데 지나면서 슬쩍 내 키와 견주어봤더니 나보다 더 작은 키는 아닐 것 같았다. 그 여성은 굽이 아예 없는 구두였고 나도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굽이 있는 구두였으니 그 여성의 키는 최소한 175는 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이 여성도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 여성도 나처럼 뒤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좀 더 앞서가려고 그랬을수도 있는데 이번엔 내가 괜한 승부욕이 발동해서 좀 더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내 시야에서 그 여성은 안보이게 되었지만 나는 그대로 갈아타는 역까지 갔다.

아, 그런데 내가 타야 할 열차의 반대편으로 가 버린 것이다. 중간에 다른 통로로 빠졌어야 했는데 오로지 앞만 보고 한가지 생각만으로 가다보니 무심결에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사실은 돌아가는 그 길이 그리 멀지는 않지만 돌아서자니 모양 빠지는 일이었고 그대로 출구를 향해 갔다. 티켓팅을 해야 되는 거라면 그냥 타넘어서 반대편으로 갈 생각이었다. 한데 참 다행스럽게도 막혀 있지 않고 반대편으로 통하는 역이었다.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출처는 드라마 '아이리스' 홈페이지.

집에 와서 TV를 보는데 여자 대학생들이 나와서 키 얘기를 하고 있다. 키 작은 남자는 전혀 관심이 없단다. 170이면 나보다도 작구만 키 타령하는게 꽤 거슬리기는 했다. 집중해서 볼만한 프로그램도 아니었고 TV를 집중해서 보는 편도 아니기에 인터넷을 발칵 뒤집어놓고 있는 'loser' 얘기는 못 봤다. 그런데 '장동건이어도 키가 작다면 아예 관심이 없다'는 취지의 말을 누가 했던 것 같은데 키가 절대적인 조건이 된다는 사실이 좀 놀랍다.

여기서 재미있는건 장동건의 인기 비결은 오로지 키에 있었던가 싶은데 다행히 장동건은 키가 딱 180이란다. 이건 우연의 수치인건지 장동건의 키가 여성들의 이상적인 표준 키로 인식되어진건지 몰라도 묘하게 딱 들어맞는다. 이거 어째 키까지 180인 장동건을 비난해야 될 것도 같은데 그래도 장동건의 키가 175 정도라면 그 여대생이 과연 장동건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는 회의적이다. 벌어들이는 돈이 얼만데 아마도 누구보다 빨리 줄 서게 될거라는 예상이 더 설득력이 있을거라고 본다.

이 프로그램은 그냥 소위 '된장녀'라 불리는 여자 대학생 몇 데려다놓고 잡소리하면서 시간 때운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다. 나는 집단 최면에 걸린 두 부류의 여성들이 화면에 등장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했고 한국의 젊은 여성들의 인식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는 의미밖에 없다고 보았다. 남자는 여자보다는 키가 커야 되고, 근육도 키워야 되고, 돈도 잘 벌어야 되고, 집안일도 잘해야 되고, 여자를 공주처럼 떠받들어 모셔야 되고 등등의 집단 최면에 빠진 한국의 젊은 여성들.

"한국 여자 꼬시기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던 어떤 외국인 남자의 얘기가 떠올랐다. 본국에 돌아가면 별로 인기도 없는데 한국에만 오면 인기가 하늘을 친다고 으스대듯이 말하던 부류의 외국인 남자들에게 한국 여자들은 '참 쉬운 여자'일거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했다.

그런데 방송의 위력은 참 대단하다. 키 큰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여대생 하나가 생매장되고 있다. 여기에 쏟아지는 거의 생매장 수준의 비난들은 열등의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일 정도로 보기가 흉하다. 솔직히 작은 것 보다는 큰 게 좋고, 적은 것 보다는 많은 게 좋고, 낮은 것 보다는 높은 게 좋고 그런게 당연한 일 아니던가. 물론 'loser'라는 말까지 했다면 그건 그 여대생의 실수고 비난받아야 되겠지만 작가들이 대본을 써 준대로 말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그 여대생이 이 프로그램의 최대 피해자다. 그 말을 해주는 댓가로 얼마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손해가 그 몇 배는 될 것이다.

일반인들은 방송출연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제작진들에겐 편집이라는 치명적인 무기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익히 알고 있듯이 '나에게 한문장만 달라, 그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한 '괴벨스의 입'이 바로 편집이고 편집을 거쳐 탄생된 오늘날의 방송은 괴벨스의 입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방송은 아무런 죄의식이 없고 그 프로그램의 방어를 위해서 또다른 편집을 시도할 것이다.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출처는 드라마 '환상의 커플' 홈페이지.

"우리는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댓가를 치르고 있는 거다." 괴벨스는 이런 말도 했다. 오늘날의 방송도 대략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보면 틀리지 않다. 자꾸 방송은 방송일 뿐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은데 그건 방송의 위력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제 그 여대생은 방송제작을 위해 본인의 입을 위임하고 그 댓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며 방송제작에 희생된 희생양일 뿐이다. 비난해야 할 대상은 비틀린 사고를 말로 표현한 그 여대생이 아니라 그런 분위기로 몰아서 방송을 제작하고 편집한 방송 제작자들이다.

나는 여성상위나 여권신장을 부르짖는 한국 여성들이 왜 남성에게 종속되려는 인식을 고정하고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능력과 조건에 따라서 여자가 남자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게 남녀평등 아닌가 싶은데 여자가 남자보다 신체적 경제적 우위에 서면 안되기라도 하는듯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여성들이 좀 이상하다. 남자의 조건을 따지고 집안 따지고 그렇게 부모들이 지정해주는 소위 중매로 결혼하던 때는 옛날 얘기 아닌가. 공맹을 들먹이면 고리타분하다고 손사레를 치면서 오히려 공맹시대보다 더 고리타분한 인식을 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더라. 내 얘기를 하다가 다른 얘기가 더 많아졌다. 반대편 승강장으로 넘어가면서 "이게 다 '키 큰 여자' 때문이야"라고 말하기엔 내 발상과 행동이 좀 유치했다. 운전을 처음 시작하고 국도를 달리던 중에 내 차를 추월하는 오토바이를 따돌리기 위해 당시의 실력으로는 곡예에 가까운 운전을 하던 생각까지 떠올라 혼자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