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제빵왕김탁구' 서인숙, 탁구가 싫은 근본 이유

   
   
   
김탁구는 박변호사로부터 구일중이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거성가로 들어간다. 김탁구는 거성가에서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일중이 자기의 지분과 주주명부, 인감과 도장 모두를 넘겨주었을 때는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일거라고 생각해 구일중이 원하는 일을 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구일중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기에 그랬을 거라고 판단하고 깨어날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려는 것이기도 하다.

서인숙은 갑작스레 등장한 김탁구에게 구일중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혹시 뭐 떨어지는 유산이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얼굴 들이밀었을게 뻔한 못 돼먹은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고 모욕하며 내쫓으려고 한다. 그러자 김탁구는 구일중이 보낸 위임장을 내밀며 구일중이 뇌출혈로 쓰러진 바로 다음 날 박인택 고문 변호사가 찾아 와 구일중의 지분과 주주명부, 인감과 도장 모두를 넘겨주고 갔다며 당분간 구일중의 뜻을 따라 구일중의 대리인 노릇을 해볼 거라고 한다.

서인숙은 어디서 배워 먹지도 못한 것이 감히 거성을 경영하겠다는 것이냐며 그게 그렇게 맘대로 될 것 같냐고 쏘아붙이지만 김탁구는 그게 그렇게 못마땅하면 또 막아보라고 맞선다. 그리고 빠른 시일 내로 짐을 거성가로 옮기고 구일중이 일어나기 전까지 옆에서 돌봐 드릴 생각이라고 한다. 서인숙은 위임장을 들고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집에까지 쳐들어와서 살겠다고 하다니 아주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하지만 박변호사가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하더라는 김탁구의 말에 말문이 막힌다.



구일중이 뇌출혈로 입원하자마자 한승재는 구일중의 지분을 빼돌리기 위해 사무실 금고를 열어 보고 없자 다시 집으로 찾아와 금고를 뒤진다. 서인숙은 한승재가 금고를 뒤지는 것을 보고는 제정신이냐고 소리친다. 그러나 호적상으로 구일중의 장남은 김탁구이니 만에 하나 유서나 순서상으로 구일중의 지분이 넘어간다면 우선순위는 마준이 아니라 탁구가 되니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당연히 지분 확보를 해 둬야 한다는 한승재의 말을 듣고는 지분을 찾기 위해 온 방안을 다 헤집어 놓는다.

결국 지분을 찾아내지 못한 서인숙은 구일중의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는 구일중을 병원이 아닌 집으로 옮겨 온다. 구일중이 병원이라면 워낙에 칠색 팔색을 하는 사람이니 집으로 데려가면 훨씬 회복이 빨라질 거라는게 표면적인 이유나 실질적인 이유는 구일중이 보유한 지분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사회가 열릴 때까지 만이라도 구일중을 지척에 두고 만일의 변수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찾던 구일중의 지분을 김탁구가 들고 왔으니 서인숙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구일중이 자그마치 38 프로나 되는 지분을 마준의 몫으로는 단 1 프로도 없이 모두 다 김탁구에게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서인숙이 화나는 것도 당연하다. 구일중이 마준에 대한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에 대한 서운함에다가 서인숙이 그토록 싫어하는 김탁구에게 지분 모두를 온전히 넘겼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 만도 하다.



구마준은 누워 있는 구일중을 찾아와 지분 모두를 김탁구에게 주고 싶었냐며 이젠 더 이상 구걸하고 매달리지 않고 김탁구에게 더 이상 빼앗기지 않을 것이고 김탁구를 밟아버리고 또 밟아버릴 거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김탁구의 존재를 안 후로부터 14년간 구마준은 구일중이 줄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누리고 살았지만 김탁구의 경우는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다. 이미 구일중은 구마준에게 김탁구가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을 주고 싶다고 얘기했었는데도 구마준은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인 아비를 찾아와 갖은 모진 말들을 쏟아내고 간다.

그러나 김탁구는 구일중을 원망하거나 하지 않고 반듯하게 성장했다. 구일중이 하늘처럼 믿고 따르는 스승인 팔봉과 팔봉제빵집 식구들에게서도 신뢰와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그리고는 구일중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 구일중을 잃을 순 없다며 구일중의 뜻에 따라 어려운 일을 시작하고 옆에서 다정다감하게 얘기도 해 준다. 김탁구가 구일중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이 거성의 경영권을 노린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기에 구일중의 입장에서는 구마준보다는 김탁구에게 더 애정이 가고 믿음이 갈 수 밖에는 없다.

그렇지만 서인숙의 입장에서는 김탁구는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못 돼먹은 놈에 불과하고 아무리 용납해주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서인숙은 정략결혼을 하면서까지 구일중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지만 구일중은 한 번도 따뜻하게 바라봐주지 않았다. 그랬던 구일중이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던 김미순에게 눈길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데 그 사이에 난 자식인 김탁구라니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치욕이다. 그래서 서인숙은 끝없이 김탁구를 증오하고 아예 김탁구를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기 위해 갖은 비열한 술수를 써 왔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외부적인 현상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좀 다르다고 생각된다. 서두에 언급한 '김탁구가 구일중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혹시 뭐 떨어지는 유산이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얼굴 들이밀었을게 뻔한 못 돼먹은 놈'이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만약에 김탁구가 서인숙의 발 아래 엎드려 비굴하게 구걸하거나 행패를 부리며 돈이나 뜯어 가는 개차반이었다면 서인숙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김탁구를 괴롭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김탁구를 무릎 꿇리고 무시하고 능멸하면서 그렇게 굴욕적이고 비굴하고 비참한 기분으로 살게 해 주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탁구는 서인숙이 아무리 위협해도 비굴하게 무릎을 꿇거나 행패를 부리지 않았고 항상 당당했으며 아무리 모함하고 짓밟아도 꿋꿋하게 일어났고 반듯하게 성장했다. 서인숙은 품 안의 자식인 구마준보다도 오히려 김탁구가 더 반듯하고 당당하게 성장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몸서리쳐지도록 싫다. 서인숙은 김탁구의 진심을 모른다기보다는 진심을 알기에 더욱 싫은 것이고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고 모욕하고 싶은 것이다. 온갖 저열한 수단방법을 동원해 김탁구를 밟아버리려고 할지언정 타인들이 보는 앞에서까지 대놓고 천대하지 못하는 것은 알량한 특권의식 때문일 것이다.

'회장님 깨어나실 때까지만 좀 있을텐데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다닐 것이나 좀 뭣하면 아랫채에서 따로 묵어도 되니 아침 저녁으로 회장님께 문안만 드릴 수 있게 해달라'는 김탁구의 말을 듣고는 김탁구를 향한 시선을 바꾸었던 구자경은 구마준과 서인숙이 구일중에게 최악의 상황이 생길 것을 염두에 두고 결혼을 서두르려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해 구일중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 때 방으로 들어 온 김탁구가 구일중의 다리를 주무르며 '청산 공장에 다녀오느라 오늘은 좀 많이 늦었는데 하루 종일 심심했냐'며 다정하게 말을 거는 것을 본 구자경은 김탁구에게서 진심을 읽고는 김탁구를 남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서인숙이 구자경과는 달리 김탁구의 진심을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서인숙의 가치관에 있다. 서인숙은 사랑이든 진심이든 모두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신봉하며 살아왔다. 구일중의 사랑을 얻기 위해 정략결혼을 선택했고 그 후로도 끝없이 회사의 지분을 놓고 구일중과 힘겨루기를 해 왔다. 서인숙에게는 돈이 권력이고 전부이기에 세상엔 부자와 빈자의 두 부류만 존재하고 부자와 빈자는 애초부터 격이 다르고 부자는 빈자를 지배하고 빈자는 부자에게 복종하는게 당연하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서인숙이 김탁구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고 진심을 인정하기 싫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서인숙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리차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프리티 우먼(Pretty Woman)에서 독신남인 에드워드가 매춘부인 비비안에게 옷을 사 입으라며 카드를 건네주면서 이런 말을 한다. 오래전에 본 영화라 정확한 대사는 아닌데 '옷집 점원은 사람을 보고 머리를 숙이는게 아니라 카드를 보고 머리를 숙인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들이 서인숙의 까탈스런 성질머리를 감내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서인숙이 잘나서가 아니라 서인숙이 가진 돈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부유층들이 가진 돈을 지키기 위해 돈으로 법과 권력을 움직이는 부도덕한 행위도 서슴치 않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