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주알 고주알/SPORTS

예의바른 이정수, 욕심쟁이 박주영

남아공 월드컵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는 무승부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졌다해도 할 말 없을만큼 나이지리아의 경기력이 좋았다. 결정적인 몇 장면에서 나이지리아가 득점으로 연결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무승부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경기에서의 운이 한국에 따랐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위험한 몇 장면을 허용했던 한국의 수비 조직력은 여전히 숙제로 남게 됐다. 사실 이번 월드컵에서 두 세 경기를 더 치르고 돌아오기를 기대하지만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전에서 보였던 한국의 허술한 수비조직력을 보면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아르헨티나전과 나이지리아전을 보면 한국 수비수들이 상대편의 개인기가 뛰어난 선수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공간을 열어주었다. 상대 공격수가 마음대로 드리블하고 슈팅까지 할 동안 강력한 압박을 하지 못했고 수비수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플레이도 없었다. 특히 뒤에서 돌아 들어가는 선수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 공간수비와 대인수비 모두 잘 되지 않았다. 한국 수비의 문제는 월드컵 지역 예선을 치르면서도 계속 지적되어 왔던 것이므로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가 한국 수비의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그에 따른 대비를 잘 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차두리의 실수가 겹치면서 실점으로 이어진 장면은 한국 축구의 수비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의 한 단면인 것 같다. 차두리의 실수가 나왔던 그 장면에서 누구보다 차범근 해설위원이 상당히 화가 났었을 것 같은데 한국팀이 강팀이 되려면 이런 실수를 줄여야 한다. 이 날 차두리의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인지 그 후에도 차두리 쪽이 많이 뚫렸고 뒤에서 돌아 들어가는 선수도 많이 놓쳤다.



결과론적이지만 허정무 감독이 아르헨티나전에서 오범석을 기용했던 선택은 옳았던 것 같다. 그리스전에서 차두리의 움직임이 워낙 좋았기에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차두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현장에 있는 감독의 판단이 더 옳았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감독의 전술적인 부분에 대해서 비판을 할 수는 있겠지만 아르헨티나전에서 패배했을 때 쏟아졌던 것과 같은 과도한 비난은 보는 사람도 불편하다. 허 감독도 전술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에 특정 선수를 폄하하는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축구팬들의 화를 부채질한 잘못은 있다고 본다.

아르헨티나전과 나이지리아전에서 특히 수비의 문제가 나타났던 한국의 오른쪽 수비수에 우루과이전에서는 누구를 기용할지 고민이 클 것 같다.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와는 팀 컬러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개인기가 뛰어난 선수들인데 아르헨티나전에서 실패한 오범석을 다시 기용해야 할 지 나이지리아전에서 불안을 노출했던 차두리를 기용할 지 선택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한국 축구는 히딩크를 기점으로 그 전과 후에는 몇 가지 중대한 변화가 생겨났다. 첫째는 세계적인 강팀과 경기를 해도 선수들이 주눅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2년 안방에서 세계적인 강팀을 꺾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자란 선수들이 대표팀의 주축선수로 성장했고,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 유수 클럽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얻은 자신감이 현재 대표팀의 수준을 한단계 높이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둘째는 유럽팀과 경기할 때의 경기력은 상당히 강해졌는데 반대로 남미팀이나 아프리카팀에는 오히려 더 약해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남미팀에게 열세를 보여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팀과 경기할 때 보다는 더 나은 경기력을 보여왔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아프리카팀들과의 경기에서 상당히 안좋은 모습을 보여왔는데 이것은 한국축구가 유럽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도 된다.

셋째는 과거에는 실점은 쉽게 하고 득점은 아주 어렵게 했었는데 현재는 실점은 여전히 쉽게 하지만 득점은 과거보다는 더 쉽게 한다. 넷째는 선수들이 강약을 조절해서 움직일 줄 안다. 과거에는 90분 동안 죽자사자 뛰어다니기만 했는데 이러한 비효율적이고 비능률적인 것을 투지라 여겼으므로 무조건 뛰어다니지 않는 선수는 많은 욕을 먹어야 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실력이 안되니 체력으로라도 버텨내야 했던 때였다. 다섯째는 선수들간의 의사소통이 잘 된다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선수들이 많이 여유로워졌다. 과거처럼 경직된 상태로 경기하거나 경기중에 선수들끼리 짜증내는 모습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은 원정 첫 16 강이란 위업을 달성했는데 이를 보고 자란 선수들이 대표팀의 주축선수로 자리매김할 때 쯤이면 한국 축구는 월드컵에서 16 강에 드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올라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엔 운도 많이 따랐던 것 같다. 현재까지 지켜본 바로는 한국팀이 속한 조에서 최하위의 경기력을 보였던 그리스와 첫 경기를 해서 쾌승을 거두었고, 아르헨티나에 예상외의 졸전으로 대패를 함으로써 나이지리아와의 마지막 경기에 대한 집중력을 높일 수 있었다. 나이지리아에게 골 운이 없었던 것도, 그리스가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를 이겨주는 바람에 예선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경우의 수에서 한국팀이 유리하게 되었던 것도 한국팀에 운이 따랐던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가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퇴장선수까지 나오게 함으로써 나이지리아를 괴롭혔던 것도 결과론적으로 한국팀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이제 16강 상대는 우루과이인데 역대 전적으로는 절대적인 열세라고는 하지만 한국팀은 그동안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비록 지기는 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경기력을 보여왔기에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8강행에 대한 기대감도 높다. 회복을 잘 해서 이젠 토너먼트로 단판 승부니까 4전 5기를 하겠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 해 그동안의 열세를 뒤집어주길 기대한다.

나이지리아전에서 한국팀이 많은 불안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소득도 있었는데 가장 큰 소득은 스트라이커인 박주영이 부담감을 털어내고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박주영은 이번 월드컵에서 극과 극을 오갔지만 오히려 그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박주영은 자살골을 기록함으로써 자존심을 구겼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멋진 골 중에 하나로 손색이 없는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다. 아마 앞으로도 월드컵 뉴스에서 박주영의 이 두 골은 방송과 언론에서 상당한 점유율을 차지할 것 같다. 그래서 제목에 박주영은 욕심쟁이라 했다.


(본문에 삽입된 이미지는 조선닷컴에서 인용)

한편 이정수는 나이지리아전에서도 골을 넣음으로써 골 넣는 수비수의 명성을 이어갔는데 나이지리아전에서 이정수가 골을 성공시키는 장면은 골을 넣기 전에 이정수가 마치 인사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피식 웃었다. 마치 '골 넣어서 미안하다'는 것으로도 보이고 '이렇게 좋은 코스로 두 번이나 공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것으로도 보이고 뭐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했었기에 제목에 이정수는 예의바르다고 했다. 이정수가 골을 넣은 장면은 처음엔 헤딩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툭 떨어지니까 발로 차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자블라니의 변화가 심한 것이라 짐작되는데 끝까지 공의 궤적을 놓치지 않고 골을 성공시킨 이정수의 집중력이 대단했다.


*** 이 글을 쓰고 이미지를 구하려고 검색을 하려니 '동방예의지국 슛'이란 기사 제목이 보이는데 마치 내가 표절이라도 한듯해서 글을 등록하는 기분은 좀 찜찜하나 이 글은 어제 저녁부터 머릿속에 정리해서 쓴 글이라 그냥 등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