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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프린세스' 민주화를 희화화한 장면 씁쓸하다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 15회는 별다른 내용도 없이 김태희와 송승헌의 스킨십 장면만으로 방송 분량의 절반을 채웠다고 한다면 과장이 심한가? 하여튼 그 정도로 드라마는 지루하게 전개되었고 보는 내내 불편하기만 했다. 차라리 이전 글에서도 썼듯이 이설 공주가 직접 짰던 공주 수업 계획에 나와 있던 인물들이나 출연시켜서 방송 분량을 채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김태희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거나 시도 때도 없이 스킨십하는 장면들만으로 드라마를 끌고 갈 수 있을 거라는 제작진들의 자신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15회 방송에는 좀 씁쓸한 장면이 하나 나온다. 극중 인물인 금자당 대표 소순우가 박해영을 찾아가 민주화를 자기가 다 이룩했다며 으스대는 장면이 그것이다. 지난 주 방송된 장면 중에 특정 지역과 정치인을 비하하는 장면이 있었다며 일부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은 단순히 현실 정치꾼들을 풍자하는 것이라고만 보기에는 뭔가 개운치 않고 좀 씁쓸하다.

박해영은 박동재가 사망하자 전 재산을 황실재단에 기부하고 황실재단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박동재의 유지를 잇기로 결심하고 뉴욕에 찾아가 박태준의 유류분 포기 각서를 들고 돌아온다. 그러나 정작 박해영은 자신의 유류분 포기 각서에 서명하지 않은 채 언론 등에 황실이 재건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듯한 기사를 흘린다. 박해영의 의도는 박동재가 사회에 환원한 돈을 박해영이 떼먹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유권자들이 투표에 많이 참여하게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박해영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하는 소순우는 뉴스를 보고 박해영에게 여러번 전화를 걸지만 박해영은 전화를 받지 않자 직접 박해영을 찾아간다. 소순우는 박해영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이런 날이 올 걸 믿어 의심치 않았고 지금 내 일처럼 기쁘다며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너스레를 떤다. 박해영이 요즘 밥도 못 먹고 다니냐고 비아냥거리지만 소순우는 재산 환원이다 뭐다, 돌아가신 회장님의 유지를 받들겠다, 뭐 그런 게 훌륭하지만 살아보면 남자는 무조건 돈이라고 한다.

박해영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소순우는 환원하는 것은 남의 돈일 때 얘기이고 진짜 환원하려는 건 미쳤다며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그저 나하고 모든 걸 의논하면 되는거'라고 한다. 그리고 "나 알잖어, 나. 대한민국 민주화 내가 다 이룩했어. 자네가 이 시점에서 나만 한번 딱 밀어주면 4년쯤 후에 내가 대통령이 되가지고 작게는..."라며 더 말을 하려는데 남정우가 찾아온다. 박해영은 남정우를 따라 자리를 뜨는데 소순우는 박해영의 뒤에다 대고 "아, 이거봐. 이사람 저사람 믿지 말고 나만 믿으래니까"라고 소리친다.

소순우의 극중 언행을 보면 상당히 가관이다. 박동재의 힘을 빌려 대통령에 오른 이영찬이 박동재의 요청으로 황실재건 계획을 발표하자 소순우는 길거리에서 황실재건을 철회하라며 단식투쟁을 시작한다. 이 때 오윤주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건네는 보좌관에게 자꾸 전화를 받으면 사진이 별로라며 비키라고 하지만 오윤주의 전화라는 말에 보좌관더러 기자들을 가리라 지시하고 전화를 받는다.



오윤주가 박동재가 보냈는데 전화로 할 말이 아니라고 하자 소순우는 보좌관에게 '나 받아야 돼'라고 지시하고는 일부러 쓰러지는 척 연기한다. 그리고 소순우는 병원에 입원해서 호사스러운 음식을 잔뜩 입에 넣는다. 오윤주가 찾아와 단식 투쟁 하루만에 접었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보자 소순우는 말한다. "이럴 때는 말야. 그저 순리에 따라서 국민들 손에 맡겨둬야 되는거야. 그냥 지금 팍 터뜨려버리자고. 집안 학벌 뭐하나 볼 것 없이 후진 기집애라매. 국민들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니까."

언론에 황세손 이한에 대한 악성 루머를 흘려 '황세손 이한 방탕한 과거 밝혀져'라는 제하의 뉴스가 나오게 만들었던 것도 소순우였다. 황실재건한다는 사실을 안 박해영은 이설을 해외로 빼돌리려고 하지만 출국금지자 명단에 올라 있자 소순우를 찾아가 출국금지를 풀어달라고 요구한다. 소순우는 그보다 쉽게 하는 법이 있다며 박해영에게 말한다. "듣자하니 순탄치 못하게 자랐다며. 언론에 한번 터뜨리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손댈 필요도 없을 걸. 공주 생부가 막노동꾼이었다면서. 말이 좋아 황손이지 뒷골목 양아치였어. 여자도 한둘이 아니었다는데 솔직히 어느 놈 씬지 어떤 작부 몸에서 나왔는지 알게 뭔가. 공주라니 가당치도 않지. 이거만 한방 빵 터뜨리면 그냥 게임 끝이야."

소순우가 단식 투쟁을 끝낸 후 찾아온 박해영에게 "내가 원래 아플수록 사람이 빛이 나고 그래. 정치인이 가끔 피곤해보이고 아파보여야 동정표도 얻고 그러는데 난 참 핸디캡이 많다?"라며 말한다. 이영찬 대통령은 소순우를 불러 함께 헌혈을 하자고 하는 자리에서 소순우는 기자들이 있으니 마지못해 헌혈을 하기는 하지만 기자들에게 "포토 양반, 나 오늘 메이크업 못하고 왔는데 포샵 좀 부탁합시다"라고 한다. 기자들이 나가자마자 소순우는 빈혈이 있다며 바늘을 빼버린다.



금자당과 대한그룹이 영영 화해 못하는거 아니냐며 대통령과 박동재의 비밀회동에 시기를 하면서도 황실재건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등 소순우가 이런 천박한 언동을 하는 밑바탕에는 돈이 있다. '남자는 무조건 돈'이라 보기에 소순우는 황실재건 반대 단식 투쟁을 하다가 박동재가 보내서 왔다는 오윤주의 전화 한통화에 즉시 단식 투쟁을 중단한다. 소순우가 계속해서 황실재건을 반대하는 이유도 박동재나 박해영이 가진 돈으로 대통령이 되보기 위해서이다.

박동재의 돈에 눈 먼 인물은 이영찬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박동재의 돈의 힘을 빌려서였다. 황실재건이라는 박동재의 요구를 받은 이영찬이 군말 없이 '황실은 지역, 계급, 세대를 아우르는 우리의 민족적 구심점이 되어줄 것이라며 황실 재건 안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것이나 사무관에 불과한 박해영이 이영찬을 협박할 수 있는 것에서 보면 박동재의 돈이 이영찬의 비자금으로 들어간 게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이영찬은 겉으로는 황실재건을 찬성하는 것 같으나 실은 황실재건을 막으려 한다. 이영찬은 공주의 인기사 올라가자 '천부적 말 바꾸기 실력'이라며 이설 공주를 청와대의 얼굴마담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같은 편이라 여기는 박해영에게 드러낸다. 이영찬과 소순우는 황실재건을 막고 이설 공주를 이용하려는 면에서는 같다. 그러나 이영찬은 표리부동하다면 소순우는 어리숙하고 찌질하다.



이처럼 드라마에는 현실 정치꾼들을 풍자하는 장면들이 꽤 나온다. 그래서 소순우가 박해영을 회유하기 위해 '대한민국 민주화 내가 다 이룩했어'라며 으스대고 박해영의 돈으로 4년 뒤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장면을 그런 연장선에서 보아넘길 수도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천박한 언동을 일삼는 소순우의 입을 빌어 민주화를 희화화하는 것은 보기에 그다지 편하지가 않다. 지난 주 방송에 특정 지역과 특정인 비하 장면이 있었다며 일부에서 논란이 되었던 적도 있었기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민주화 운동을 했다가 현실 정치꾼이 된 사람들 중에는 민주화 운동 경력을 마치 훈장처럼 떠벌이며 소순우에 버금가는 천박한 언동을 일삼는 자들이 없지는 않다. 또한 민주화 운동에는 관심조차도 없었으면서도 경력에 슬그머니 끼워넣는 정치꾼들도 있다. 그래서 드라마가 소순우의 입을 빌어 민주화를 희화화한 장면은 이래저래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