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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신입사원' 지원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MBC가 공정성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젠 아주 치졸해져가고 있다. MBC에서 이니셜 M은 주지하다시피 문화(Munhwa)인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MBC가 과연 문화방송으로 불릴 만한 방송인지 의문이 든다.

방송하는 프로그램들마다 뒤바뀐 출생의 비밀 아니면 과소비나 호화생활을 영위하는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사회 계층 간에 위화감을 조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내용들이거나 어디서 베껴낸 티가 역력하게 보이거나 대형 물량공세로 화려한 비주얼에만 집착하거나 하고 있다. 시청자들의 니즈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거나 아예 무시로 일관해온 지도 이미 오래이며 적당히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가 슬그머니 엎어버리는 것만 반복해오고 있다.

MBC가 결국 시청률 부족에 허덕이던 '일밤'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나는 작년 11월 1일 '일밤 - 오늘을 즐겨라' 리뷰에서 '얼마 안가 슬그머니 새로운 코너로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었던 적이 있다. 중간에 아시안게임이 열렸기 때문에 결방이 많았었으니 당시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꽤 오래 버틴 셈이다.

'일밤' 후속으로는 '신입사원'이란 프로그램이 방송된다고 공개했다. 프로그램 소개를 보면 아나운서를 공개채용하는데 오디션 전 과정이 방송을 통해 공개된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 '신입사원'은 현재 방송 중인 '위대한 탄생'이 연상되며 크게 다르지 않은 포맷의 방송이 되지 않을까 예상된다. 그런데 '위대한 탄생'은 모 케이블 방송에서 했던 프로그램이 연상되는데 벤치마킹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쑥스러울 정도로 두 프로그램의 포맷은 유사하다.

MBC가 주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시청률에 얼마나 목매고 있는지 알 만하다. 그리고 얼마나 궁했으면 하루 걸러 주말 버라이어티에도 오디션 프로그램을 편성했을지 MBC의 딱한 모양새가 참으로 군색스러워 보인다. '위대한 탄생'이란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괜찮게 나오고 있다는 얘기인지 오디션 프로그램의 유행에 대한 무한신뢰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루 걸러서 편성되는 '신입사원'이 과연 휴일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얼마나 선전할지는 의문이다.


(MBC 프로그램 홈페이지 캡쳐)

그런데 이 '신입사원'이 방송을 시작하기도 전에 노예계약 논란에 휩싸였다. MBC는 이미 지난달 31일부터 프로그램 홈페이지를 통해 '신입사원' 지원자들의 원서를 접수하고 있다. 지원서를 작성하려면 지원서 작성 페이지에 있는 5개 항목에 모두 동의한다는 의사표시를 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지원서 동의 항목이 지나친 사생활 침해가 아니냐는 논란이 되고 있다.

지원자가 반드시 동의해야 지원이 가능한 5개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이 지원서를 냄으로써 나는 (주)MBC에게 내 목소리, 행동, 이름, 모습, 개인 정보를 포함한 기록된 모든 사항을 프로그램에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합니다. 또한, 프로그램 지원 시 첨부된 사진이나 동영상 중 제작팀에 의해 수정된 결과물들을 프로그램에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합니다. 나는 출연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영상이 관계자들에 의해 수정될 수 있음에 동의하고 관계자들이 저작권 등 프로그램에 관련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 동의하며 제출한 모든 자료의 사용과 수정에 동의합니다.

2. 관계자들이 출판, 프로모션, 광고, 마케팅 등의 분야에서 모든 권한은 (주)MBC에게 있고 나의 초상과 자료를 2차적 저작물의 사용 등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용에 대해 명예 훼손이나 사생활 침해 등을 포함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에 동의합니다.

3. 나는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내 초상이나 자료 출판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관계자들의 개입을 허락하고 이에 대한 명예손상이나 사생활 침범 등을 포함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에 동의합니다. 또한 (주)MBC가 필요에 의해 나의 초상과 모든 자료들을 사용, 수정, 복사, 출판, 공연, 배급, 선전할 수 있으며 이에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계약 할 수 있음에 동의합니다.

4. 나는 (주)MBC와 본 프로그램에 관련된 관계자 및 모든 제작진이 나의
1) 프로그램 지원 및 참가,
2) 프로그램의 방영취소,
3) 사생활 침해
4) 명예 훼손
5) 신체적, 정신적 손상
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해야 하는 의무가 없음에 동의합니다.

5. 나는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전, 후를 통틀어 다른 참가자나 그 어떤 사람에게도 내가 지원함으로써 알게 된 (주)MBC나 프로그램 관련 내용, 프로그램 관계 회사 및 관계자, 프로그램의 행사, 선발 결과나 내용을 포함한 모든 정보에 대해 허용된 범위 외에는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에 동의합니다. 만약 이 지원서에 쓰인 내용에 대해 하나라도 불이행하는 일이 생기면 (주)MBC는 나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알며 이 불이행이 (주)MBC에 끼칠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알고 있으며, 불이행 했을 시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일견 보기에도 소위 노예계약서를 떠올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MBC 아나운서가 되기를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원자들은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하고 주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시청률 제고를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디션 과정에서 사생활이 침해되고 명예가 훼손되고 정신적 손상을 입어도 MBC가 이에 대해 보상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서는 지원자들의 어떠한 개인사라도 전국방방곡곡에 까발려서 그들의 아픈 상처를 헤집어놓고 탈락시켜도 그만이다.

선발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지원서에 밝힐 수 밖에 없는 지원자들의 절박한 심리를 프로그램의 시청률 제고에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자칫 지원자는 아무 이유 없이 욕설을 배설하고 돌아다니는 수많은 네티즌들로부터 뭇매를 맞는 이중 삼중의 정신적 고충을 겪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MBC는 이와 관련해서 도덕적 금전적 책임의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도 누군가에겐 이 프로그램이 방송에 데뷔할 기회가 되고 또 운이 좋으면 최종적으로 합격해서 위대한 문화방송의 아나운서가 될 수도 있으니 지원자는 당연히 많아질 것이다. 학력, 성별, 연령의 제한없이 누구나 MBC 아나운서가 될 수 있다는데 이 얼마나 달콤한가. 그런데 모든 신상 정보를 낱낱이 까발렸다가 결국 탈락하게 된다면 그 후유증은 모두 지원자 본인의 몫으로 남는다. 운좋게 합격한다해도 어쩌면 상처뿐인 영광만 남게 될 지도 모른다.


(MBC 프로그램 홈페이지 캡쳐)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서 연예인 노예계약을 폭로했던 MBC가 이젠 전 국민을 상대로 노예계약서를 들이밀고 있다. 또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시청률 지상주의의 폐해를 논하던 MBC가 자사의 프로그램 하나 살리자고 전 국민을 시청률 지상주의에 동원하려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시청률에 목말라 있다면 콘텐츠의 품질로 승부해라. 그러려면 먼저 시청자의 니즈를 파악해라. 대형 물량공세와 화려한 비주얼이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시청자의 니즈를 파악해서 시청자와의 공감대를 늘릴 수 없다면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전에도 이런 취지로 언급했었지만 지금도 이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미 프로그램이 공개되었으니 여기에 한가지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아나운서가 되려하거나 연예계로 진출할 목적으로 프로그램에 지원한 사람들의 신상정보를 까발리더라도 마지노선은 지켜라. 방송 과정에서 생기는 뜻하지 않은 부작용에 대해서는 MBC도 책임지겠다는 태도로 방송을 제작해라.

'신입사원'의 노예계약서 논란과 관련한 기사를 읽어 보다가 놀라운 것 한가지가 눈에 띄었다. 조선닷컴에 보면 '신입사원' 제작진은 "일반인들이 방송 출연을 하게 될 때 작성하게 되는 서류와 유사한 형식"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세상에 일반인이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저런 무시무시한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 한다는 얘기인가?

이번 MBC '무한도전'이나 지난 번 KBS '미수다'에 출연했던 일반인들이 몰지각한 네티즌들로부터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해도 방송제작진들이 이와 관련해서 아무런 책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고 그 이유가 굉장히 궁금했다. 일반인을 프로그램에 출연시켜서 방송 제작 의도대로 다 이용해먹고서는 그 후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안이하고 무책임하게 대처하는 제작진들의 태도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비밀이 바로 위와 유사한 내용의 동의서에 있었다는 얘기인가?

만약에 일반인이 방송에 출연할 때에 위에 언급한 것과 유사한 내용의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 하는거라면 이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방송사로서 부득이하게 출연자에게 요구할 수 밖에 없을거라고 생각되는 내용도 있으나 2, 3, 4에 기재된 내용은 지나치게 불공정하다. 현실은 잘 모르나 일반인들도 방송 출연을 했다가 뜻하지 않은 피해를 당해왔던 것으로 보면 일반인들도 방송과 방송의 숙주들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려면 방송의 포맷대로만 끌려다니지 않을 방도를 스스로 강구해야 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