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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SPORTS

나는 길거리 응원의 원조

나는 축구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 길을 가다가도 어디선가 축구 경기를 하고 있으면 그것을 관전하느라 정작 내 계획은 미뤄버리는 때가 많았었다. 가령 축구 경기를 중계하는 TV를 켜놓은 곳이 있다면 슬쩍 보고 가느라 시간을 지체한다든가 등산을 계획하고 나섰다가 가는 길에 운동장에서 동네 축구를 하고 있다면 잠시 보고 가자고 눌러 앉았다가 결국 등산을 포기하게 되는 식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가장 황당했던 경우는 축구 경기를 보다가 오후 일정을 완전히 날려버렸던 때였다.

아마 90년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종합운동장역을 지나던 중 우연히 한일 여자 축구 대표팀 경기를 한다는 안내가 눈에 띄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여자 축구는 한국에서 그리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때였는데 호기심이 발동했고 짧은 망설임 끝에 잠실주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조금만 보고 일어서려고 들어갔던 거였는데 여자 축구 경기에 앞서 한일 국회의원 축구경기가 먼저 시작되면서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결국 오후를 몽땅 제껴버리고 말았고 이 사실을 안 주위 사람들이 어이없어했는데 가장 황망했던건 물론 나 자신이었다.

오래되고 황당한 기억이라 각각의 경기 결과는 잘 모르겠는데 한일 국회의원 축구 경기에서는 정몽준씨가 후반엔가 교체 투입되었고 동료 의원들의 적극적인 아부성 도움을 받아 골을 넣었던 것 같다. 이 때 축구를 꽤 잘하는 국회의원도 눈에 띄었었는데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한가지 씁쓸한 일화를 소개해 본다. 경기장에 들어가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사복 경찰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여자 축구 경기에 경찰이 저리 많이 들어왔다고 생각하기도 어렵고 그들이 뭐하는 사람들인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그 의문은 한일 국회의원 축구 경기가 시작되면서 풀렸는데 그들은 사복경찰이 맞았다. 한일 양국의 VIP들이 대거 참여했으니 그 정도의 경호는 당연히 수반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궁금했을 것이고 어쩌면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이 때 앞 좌석에 앉은 젊은이가 옆에 앉은 중년 여성에게 '짭새들 왜 이렇게 많아? 짭새들 천지네'라고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 앞에 앉은 두 젊은이가 그 말을 듣고 뒤로 돌아보면서 '짜바리라고도 하지요, 국회의원들이 많이 와 있으니까요'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중년 여성이 당황하면서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옆의 젊은이에게도 사과하라고 시켰는데 젊은이도 역시 사과를 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사정은 이랬다. 중년 여성은 국회의원의 부인이었고 그 옆의 젊은이는 그 아들이었으며 두 젊은이는 말 그대로 짭새였다. 자기들 경호해주러 온 젊은이들에게 대놓고 짭새라고 소리 질렀으니 황당했겠지만 상대가 고귀하신 국회의원의 자제이니 뭐 어쩌겠나. 그러고보면 군바리나 짭새로나 불리는 군대 간 한국의 젊은이들은 참 불쌍하다.



한국은 언제부턴가 한국 대표팀 축구 경기 특히 월드컵 경기가 열리면 많은 사람들이 서울광장이나 대형 모니터가 있는 길거리에 모여 함께 응원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이 길거리 응원은 2002년 월드컵 당시에 응원하기 위해 모여든 인파가 광화문에서 서울광장에 이르기까지의 대로를 점령할 정도로 대규모로 불어나며 길거리 응원의 정점을 이루었다. 그 후부터는 올림픽이나 WBC 경기를 응원하는 등으로 그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대규모 길거리 응원은 세계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후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에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기 위해 월드컵이 열리는 국가가 아닌 서울광장으로 오는 외국인 여행객들도 생겼다하니 길거리 응원은 하나의 관광상품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국가대표팀 축구 경기가 열리면 으레 길거리 응원에 나서고 별로 낯설지 않은 광경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길거리 응원이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을 토대로 언급을 해보려고 하는데 오래된 기억이라 시점은 다를 수도 있다.

길거리 응원의 인파가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했던 것은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이 치러지고 있던 때였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길거리 응원이 서울광장으로 대변되지만 처음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곳은 세종로 사거리였다. 당시엔 광화문 전철역이 생기기 전이었는데 지하보도에서 올라오면 사방의 대형건물 외벽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서 중계해주는 국가대표팀 축구 경기를 가장 편한 곳에 서서 시청할 수가 있었다.

물론 나도 당시에 길거리에 있었는데 그 때만 해도 응원을 했다기보다는 모여서 축구 경기를 시청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축구 경기는 이미 시작되었는데 집에 가서 경기를 보려면 끝나 있을 시간이고 다 보고 가도 괜찮을만한 시간대였기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대형모니터에 나오는 경기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을로 가던 때라 쌀쌀해졌음에도 사람들은 더 늘어나게 되었고 일부러 세종로 사거리로 찾아 와 축구를 시청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 때쯤에 나는 대규모로 사람들이 모이는 길거리에서 축구 경기를 시청하지 않게 되었는데 사정은 이랬다. 98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이 치뤄지던 때라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호주가 참가하지 않았고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아시아 지역 예선에 참가하던 때였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축구 실력이 상당히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고 부담스러웠기에 다크호스로 지목되기도 했었다. 그 때가 한국 대표팀이 카자흐스탄과의 원정경기를 치르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국 선수들의 몸이 너무 무거웠고 경기 내용도 최악이었다.



경기를 시청하던 중에 나는 "야 야 패스하지 마", "야 야 나와"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패스하면 오프사이드가 되는 상황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패스가 이루어졌고 당연히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다. 이어지는 리플레이 장면을 보니 오프사이드에 위치한 한국 선수는 세 명이나 되었다. "야 이 놈들아. 세 명씩이나 안 움직이고 거기서 뭐하고 서성거리고 있노?" 경기 내용도 정말 답답했던 터라 이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이내 내게 따가운 눈총들이 쏟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축구 경기를 관전하는 습관이고 삼삼오오 모여서 시청할 때는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렇게 비판적인 말을 하는게 이상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고 판단하면서 나는 대규모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축구를 시청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2년 월드컵 당시에 세종로 사거리에서 서울광장을 꽉 메울 정도로 불어 난 응원인파를 뉴스에서 보게 되었고 이것은 나에게도 굉장한 충격이었다. 어느 정도는 모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인파가 모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에 1승이라도 거두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한국대표팀의 전력을 반신반의하기도 했고 어느순간부터 길거리에서 축구를 보지 않던 내가 수선을 떨면 오히려 결과가 안좋을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광화문으로 나가지는 않았었다.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인 포르투갈과의 경기를 시울광장에서 시청하기는 했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은터라 불편함이 커서 그 후의 경기는 동네에서 시청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는 한국 대표팀이 첫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경기 내용도 좋았기에 길거리 응원은 서울 지방 할 것 없이 활화산처럼 번져나갔고 어디서든 사람이 모일만한 곳이면 대형 화면을 설치해서 모두 모여 경기를 시청하며 응원했었다. 한국 대표팀의 선전과 맞물린 2002년 여름의 그 뜨거웠던 열기는 언제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도대체 뭐가 그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고 한 곳을 바라보며 한 가지 소망으로 열렬히 응원하게 만들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 뜨거운 열망이 모여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언제부턴가 대표팀 선발이나 축구 관련 글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면 그 내용에 대한 정당한 반박을 하기보다는 '축구는 쥐뿔 모른다'거나 '월드컵 때만 축구를 본다'는 등의 근거없는 언사를 동원해가며 특정 선수들이나 글쓴이에게 온갖 막말과 욕설을 배설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들의 터무니없는 상상은 어처구니가 없지만 막말과 욕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여기저기에 배설하고 다니기 전에 자기가 써 놓은 그 배설물들을 보고 본인들의 잘못된 인성을 먼저 되돌아보는게 맞을 것이다. 설사 축구를 모르거나 월드컵 때만 본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의견을 표출하면 안되고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면 안된다는 그 인식이 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월드컵 때만 되면 알몸에 가까운 패션으로 길거리에 나서는 일부 사람들의 행동은 보기에 안 좋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생겨난 원인은 축구보다는 그런 것을 위주로 이슈화함으로써 부채질했던 방송과 언론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보는데 이런 현상은 지양되는게 좋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