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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노비당엔 '그분' 실체를 아는 자가 있었다

'추노'에서 의문을 갖게 하던 '그분'의 실체가 결국 '그분'이 아니라 '그놈'으로 밝혀졌다. 대다수의 시청자들도 '그분'의 실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 이것을 깜짝반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깜짝반전은 '그분'의 실체가 아니라 노비당의 노비들을 경멸하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게 변신한 '그분' 박기웅의 놀라운 연기였다. 싸이코패스가 사람을 살해할 때 저렇게 변신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될 정도로 박기웅의 연기는 끔찍했다. 이 드라마의 인기 비결은 오로지 연기자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촬영 덕분이다.

그리고 노비당에도 '그분'의 실체를 아는 자는 있었다. 그분의 실체가 그놈으로 밝혀진 것이 깜짝반전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노비당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권력층임을 '추노'에서 처음으로 밝힌 것은 업복이가 양반 둘을 아무런 이유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사살해버렸을 때였다. (이전 글 참조 : '추노' 사라진 추격자, 이유없는 양반살해 왜?) 죽여야 할 양반의 악행을 알고 죽이는게 옳다고 공감하는 상태에서 양반을 살해하던 노비당이 이 날 방송분에서는 왜 죽여야하는지 이유도 모른채 누군가의 지시를 받자 기계적으로 양반을 사살해버린 것이다. 이 때에는 배후세력이 권력층임은 맞는데 누구인지를 특정할 수 있는 단서는 미약했다.



그런데 노비당의 배후세력을 특정하게 해 준 사건이 있었다. 업복이가 노비당 노비들과 함께 용골대 부하인 용이 일행을 공격했던 사건이었다. 오래되서 용이 일행이 그 쪽으로 가게 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용골대와 그 부하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꿰고 있는 사람은 바로 좌의정 이경식이다. 인조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에는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고 항복하는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이경식은 인조의 그러한 어심을 정확히 읽어내면서 물소뿔을 사들이며 청과의 전쟁준비를 위한 여건을 조성해 나가는 동시에 개인적인 치부(致富)를 하려는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이경식은 용골대 일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노비당 일행이 이 날 공격한 것은 양반 일행이 아니라 극비리에 움직였던 용골대 부하인 용이 일행이었다는 것은 노비당의 배후세력이 바로 좌의정 이경식이라는 것을 정확히 특정해주고 있다. 업복이 일행은 이 날도 지난번 양반 둘을 사살해버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양반 여럿이 지나간다는 정보만 받고 양반들을 죽이러 갔으며 그들이 실제 양반인지 노비들을 핍박하는 양반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노비당이 이 때에는 이미 완벽하게 이경식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업복이 일행은 용골대 부하인 용이 일행으로부터 역습을 받고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여기서 바로 그분이 나타나서 업복이 일행을 구했는데 이것은 그분이 바로 이경식의 끄나풀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경식의 수하인 것은 맞지만 과연 이경식과 어떤 관계인지만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결국은 자기의 출세를 위해 노비당을 이용한 비열한 그놈이었다. 그래봐야 그도 결국엔 이경식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당한 권력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그분은 자기의 출세를 도와준 노비들에게 냄새난다고 모욕했지만 정작 추악한 냄새는 바로 그분과 좌의정 이경식이 풍기는 냄새일 것이다.


('추노' 홈페이지 이미지 인용)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추노' 노비당에도 그분의 실체를 아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노비당에는 특이한 놈이 하나 있는데 바로 원기윤이다. 원기윤은 업복이와 함께 이대길 일행에게 붙잡혔는데 세상 물정을 꿰고 있으며 돈을 불릴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양심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비열하다. 한마디로 신뢰나 의리 이런 것과는 담을 쌓은 인물이며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한다. 원기윤을 연기한 배우의 이름이 윤기원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원기윤은 사살한 양반에게서 빼앗은 어음을 교환하는데 어음 교환이 용이하지 않다고 눙치며 어음에 적힌 액수의 절반을 챙기는등 수시로 돈을 몰래 빼돌린다. 원기윤이 어음을 융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과 그분의 배후인 이경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눈치 빠른 원기윤은 그분이 노비당의 후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리가 없는데 그분의 배후에 이경식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확신하지 못했을수도 있다. 원기윤이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노비당에서 눙치고 있었던 것은 그분이 반대급부를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역할을 함으로써 돈을 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기윤이 그분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극중에서 가끔씩 음흉하게 조소하던 장면에서도 추정할 수 있는데 결정적인 것은 그분이 원기윤을 살해하러 직접 찾아 간 것이다. 그분이 직접 원기윤을 살해한 것은 그분의 계획이 종착점에 다다랐는데 이미 이용가치가 떨어진 원기윤이 그분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혜청 습격을 앞둔 시점에 원기윤을 제거하러 찾아 간 이유는 눈치 빠른 원기윤이 선혜청 습격 사실을 알게 되면 증발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원기윤이 챙긴 돈도 탐났을 것이다.

그분이 경계한 것은 업복이와 원기윤이었는데 이용가치가 사라진 원기윤은 직접 살해해서 후환을 없앴지만 마지막까지 이용가치가 있었던 업복이를 직접 제거하지 못한 것은 미처 예상하고 대비하지 못한 실수였다. 궁궐로 들어가고 나면 자기의 정체를 모르는 '냄새나는' 노비 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가볍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벼운 실수로 그분은 결국엔 업복이의 총에 희생되고 만다.


(OSEN 이미지 인용 ; 원본 이미지에서 윗 부분만 잘랐습니다)

드라마 '추노'는 일단 어떤 상황과 인물부터 던져놓고 시청자들이 궁금증을 갖게 하는 식으로 얘기를 전개한다. 그런데 먼저 던져놓은 상황이나 인물은 대개 '낚시'인 경우가 많다. 던져진 상황이나 인물에게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해보게 만들지만 결국엔 별 것이 없는, 시청자들로서는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런 드라마는 방영중이라면 어떤 것이든 의미를 부여하고 궁금해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이고 '가지고 노는'(극중에서 그분의 정체를 안 끝봉이가 한 말) 작가의 의도에 말리는 것 같다. 단시간에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상당한 기간을 두고 제작 방영되는 드라마라면 이런 식의 스토리 전개는 계속 통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드라마는 내용적으로는 '누가 죽고 누가 살아 남는가에만 의미가 있는 피비린내'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촬영이나 연기자들의 뛰어난 연기력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고 인기를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는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방점을 찍은 것은 박기웅의 연기였고 끝까지 내내 빛났던 것은 이다해가 아니라 김하은의 연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