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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선덕여왕, 김유신이었다면 덕만을 살해했을 것

드라마 선덕여왕 속의 유신은 참 매력적인 캐릭터다. 곧고 반듯한 성품을 지녔고 변칙적인 암수(暗數)를 쓰기 보다는 언제나 정공법을 택한다. 충실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비열한 반칙보다는 대의를 위해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고 위기에 처해 방황하는 덕만을 유신은 옆에서 지켜 주고 천명의 부탁으로 덕만과 함께 국외로 탈출을 감행하기도 할 정도로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순정파다. 때로는 미련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우직한 남성적인 카리스마는 유신의 충성심과 진정성을 신뢰할 수 있게 한다.

유신이란 캐릭터는 금년 최고의 '국민 훈남' 캐릭터로 부상할 수도 있었지만 유신을 연기하는 엄태웅의 연기력이 유신이란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해서 어중간하게 머물렀다는게 아쉽다. 물론 이 캐릭터가 제대로 살지 못한 원인을 연기자에게만 돌릴 수는 없고 오히려 제작진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미실을 위한, 미실에 의한, 미실의, 미실 여왕'으로 표현해야 될 정도로 드라마 제작진들은 시종여일 미실(미실을 연기하는 고현정)에 집착했다. 그러다보니 유신의 캐릭터는 미실에 맞추어 축소 또는 변형되었고 어느 순간 비담이 나와서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이번엔 비담을 중심으로 유신의 캐릭터는 변경되었다. 이렇게 최초에 등장했던 유신의 설정이 계속 바뀌게 되다 보니 연기자가 제대로 연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미실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덕만을 연기하는 이요원이다. 이요원의 연기를 보면 일일 방송분에서조차도 드라마 앞 부분의 연기와 뒷 부분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고 어색할때가 많았다. 처음엔 이요원의 연기력 탓으로만 생각해 타이틀 롤을 연기하려면 이런 부분을 조절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지만 드라마가 어느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제작진의 원인이 더 크다고 판단했고 '이요원 죽이기인가'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개그 프로그램의 한 코너를 응용해 가벼운 톤으로 지적해보기도 했었다.

그럼 역사 속 김유신은 어땠을까?

김유신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일통삼한(一統三韓)이란 웅지를 품은 전승무패(全勝不敗)의 전략 전술가"라고 하는 삼국사기의 평가와 "교활한 모략가이자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는 조선상고사의 평가가 그것이다.

"김유신은 지용(智勇)이 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취한(陰險鷲悍, 겉으로는 부드럽고 솔직한 체하나, 속은 내숭스럽고 음흉한데 마치 사납고 독살스러운 독수리 같다)한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대공(大功)이 전장(戰場)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인국(隣國)을 난(亂)한 자(者)이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단재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세력을 음모로 분열하고 와해시켜 멸망하게 한 신라의 반쪽짜리 통일을 반민족 행위로 보았기 때문에 김유신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단재는 김유신은 별로 대단한 장수도 아니고 비겁한 잔꾀로 민족전쟁에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정기를 훼손한 죄인으로 평가했고 골수까지 증오했던 것 같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을 전략과 전술이 뛰어난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김유신이 첩자 활용에 있어서만큼은 발군의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김유신은 첩자를 활용해 백제 지배세력의 내분을 부추기고 와해시켰는데 김유신의 첩자 활용의 백미는 649년(진덕여왕 3) 8월에 벌어졌던 도살성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김유신은 백제의 첩자를 역이용하는 반간계로 백제 진영을 교란했다고 한다.



김유신이 이렇게 첩자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김유신이 화랑이었을때 고구려 첩자인 백석(白石)을 만났던데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백석을 만난 때는 화랑이 된 18세였다하고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17세에 백석을 만났다고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죽방이 백석의 분위기였는데 이 드라마가 신라 선덕여왕 전후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 쓰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때의 생각이었다.

김유신은 자신의 누이동생 문희를 유부남이던 김춘추와 야합(野合)하게 하였다. 그리고 김춘추를 압박하기 위해 김유신은 문희가 춘추와 야합하여 아이를 배었다고 소문을 내는 한편 선덕여왕이 남산에 나들이하는 날을 골라 장작불을 질러 연기를 피워 부정(不貞)을 저지른 문희를 태워죽인다고 법석을 떨어 결국 선덕여왕의 중매로 혼인을 성사시키기까지 했다. 당시 신라는 선덕, 진덕 여왕에게 후사가 없으므로 신라의 왕통을 이을 유력자가 김춘추였는데 김춘추는 왕이 되기 위해 김유신이 필요했고 김유신은 자신의 야망과 신분상승을 이루고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김춘추가 필요했기에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구비(口碑)로 전해지는 김유신 설화중에 천관녀 얘기가 있다. 김유신은 천관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신분의 차이를 이유로 교제를 반대하는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천관녀가 자신의 야망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으로 천관녀를 잊기 위해 수련을 한다. 아마도 이 당시에는 백만돌이처럼 백만번 넘게 검을 휘둘렀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날 김유신도 모르는 사이에 김유신의 말 천둥이가 천관녀가 있는 신궁에 와 있는 것을 보고 김유신은 단칼에 자신의 애마였던 천둥이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김유신은 드라마 선덕여왕 속의 유신처럼 곧고 우직한 성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의 유신은 덕만의 출생비밀이 밝혀지고 중악으로 피신한 덕만을 보호하고 천명의 부탁으로 덕만과 함께 신라를 떠나겠다는 순정파로 나온다. 하지만 역사 속 김유신은 자신의 출세와 야망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할만큼의 순정파는 아니었다고 하겠다. 특히 드라마에서는 그 당시에 천명과의 국혼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아버지 서현공마저 덕만을 잡으려고 왔는데 역사속 김유신이었다면 기꺼이 덕만을 살해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천명과 국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김유신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인데다 그 수도 적은 편이고 박정희 시대에 영웅화가 시도되기도 했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와 같은 시도는 상당히 생뚱맞고 설득력 또한 떨어진다.

드라마 선덕여왕을 시청하지 않은지가 꽤 되었고 이 글은 시청하던 때까지의 상황을 토대로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근의 드라마속 유신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선덕여왕 포스팅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이유는 그 드라마에 대한 관심을 접고 더 이상 시청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 글은 그 전에 써보려고 했으나 미루어두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