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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SPORTS

실속축구는 실패해야 한다(화란vs브라질)

네덜란드 대 브라질의 경기, 소문난 잔치집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기대치에 훨씬 못미치는 별로 재미없는 경기였다. 이번 월드컵에서 이 두 팀의 경기 특징은 재미없는 축구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소위 '실속축구'라고 하지만 관전자들에게 흥미를 줄 수 없는 실속축구는 실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탈사커라는 개념을 창시하며 화려한 공격축구를 해왔던 네덜란드와 개인기를 앞세운 화려한 공격력으로 브라질 뿐만 아니라 세계의 축구팬들을 열광하게 했던 삼바축구의 브라질, 그래서 이 두 팀의 경기는 재미의 보증수표로 여겼고 두 팀의 맞대결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그런 두 팀이 수비지향적인 실속축구로 무장하고 나섰으니 실망도 컸다.

네덜란드는 어쨌든 경기에 이겼으니까 할 말은 없지만 브라질의 탈락은 개인적으로도 충격이다. 브라질이 네덜란드와 경기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런 비유를 했었다. 브라질은 일당백의 화려한 실력으로 적을 섬멸해나가던 람보에서 조용히 숨어 목표물을 정조준하는 스나이퍼로 변신했고, 마침내 원샷원킬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같은 팀 동료에 의해 뜻밖의 일격을 당하게되자 우왕좌왕하다가 조직력이 와해되면서 스스로 무너졌다. 적에게 위치를 들킨 스나이퍼가 급변한 상황에 대한 대처를 하지 못한 채 허둥대다가 자멸해버린 것처럼 보였다.

경기 초반엔 브라질의 흐름이 좋았는데 브라질은 브라질 특유의 짧은 패스를 통해 공격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후방에서 볼을 돌리다가 전방으로 침투하는 빠른 패스로 네덜란드의 골문을 노렸다.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은 경기 시작 7분여 만에 터진 호비뉴의 골 장면도 그랬지만 그 후 약 2분여 뒤에 나온 호비뉴의 골은 브라질의 전략을 잘 보여준다. 센터서클에서 멜루가 전방으로 패스를 했고 호비뉴가 빠른 스피드로 네덜란드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력화시키며 골을 성공시켰다. 센터서클에서부터 골문을 통과할 때까지 단 두 번의 볼터치만 있었던 것으로 효율성 측면에서 본다면 단연 최고라 할 것이다. 이 골 장면을 보면서 나는 '원샷원킬'을 성공시키는 스나이퍼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렇게 원샷원킬을 합작해냈던 멜루가 이번엔 자기편을 저격하는 실수를 하고 만다. 후반 10분여 경에 네덜란드의 스네이더르가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 외곽에서 크로스를 올렸는데 그 볼이 중복된 위치에 있었던 멜루와 골키퍼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는지 멜루의 머리를 맞고 자책골로 연결된 것이다. 그 후부터 브라질의 경기가 꼬이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후반 20분여 경에 스네이더의 골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멜루가 고의적인 반칙으로 퇴장당함으로써 브라질이 승부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 되버렸다.

멜루의 퇴장은 은폐하고 있던 스나이퍼가 흥분해서 자기팀의 위치를 적에게 노출시킴으로써 올킬당하게 만든 것처럼 연상되었다. 이 경기에서의 주연은 단연 멜루라고 할 수 있다. 멜루는 원샷원킬을 합작해냄으로써 팀 사기를 높이기도 했지만 뜻하지 않은 실수로 자기팀을 저격함으로써 팀 전체를 혼란상태에 빠뜨렸다. 그런데 그러한 실수를 만회하기보다는 오히려 흥분함으로써 팀 전체를 올킬당하는 상황으로 내몰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브라질이 이렇게까지 허둥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브라질이 경기할때마다 매번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비록 지더라도 화려한 개인기를 앞세운 브라질 특유의 축구를 했기에 브라질의 패배를 아쉬워하고 응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의 패배와 탈락이 아쉽기보다는 오히려 실망하게 된다. 실력과 능력이 되는 브라질이나 네덜란드같은 팀들이 실속축구를 앞세우며 재미없는 축구를 하는 것은 축구팬의 입장에서는 실망스럽다. 물론 화려하게 경기하고 승부에서는 진다면 빛이 바랠 수 밖에 없으므로 무조건 재미있는 축구를 해주길 바랄수는 없겠지만 실속축구가 대세로 굳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우루과이와 네덜란드의 경기는 네덜란드가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양팀 모두 경고 누적으로 출장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있지만 우루과이의 경우는 공격의 핵심으로 팀을 4강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랄 수 있는 수아레스가 이전 경기에서 퇴장당함으로써 출장할 수 없다는게 상당히 불리한 점이다. 네덜란드의 우승까지 점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는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는 실속축구가 대세로 굳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그동안 응원해왔던 네덜란드가 결승에 오르지 않기를 원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경기 종료 시점에 공을 코너플래그포스트에 몰아넣고 시간을 끈다든가 골키퍼가 그냥 잡아도 되는 공을 넘어지면서 잡는다든가 심판에게 시간이 다 되었다고 항의하는 장면들도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았었다.

한편 이 경기는 그 외에도 중계, 해설, 심판 등 총합적인 문제점이 드러난 경기였다고 생각한다. 경기 초반에 차범근 해설위원의 해설이 매끄럽지 않았던 것 같다.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았던 브라질 호비뉴의 골 장면이었는데 오프사이드가 아닌가 생각했고 휘슬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그 상황이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중계화면은 계속해서 볼을 따라갔고 차범근 해설위원도 그에 맞추어서 해설을 했다. 곧 이어 오프사이드 판정이 내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TV 화면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경기장 내의 전체적인 상황을 전달해주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또한 심판은 호비뉴의 오프사이드나 멜루의 퇴장을 잡아내며 그런대로 무난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불필요하게 경기의 흐름을 끊는 장면이 많았고 전체적인 경기운영 능력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현재까지는 독일 대 아르헨티나 경기의 심판이 가장 이상적으로 경기운영을 잘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 경기 시작에 앞서 양팀 주장이 선언문을 낭독하는 조금은 낯선 광경이 연출되었는데 캐스터가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현장 소음이 커서 잘 들리지 않는다며 시간을 끌었다가 곧 인종차별 금지 등의 내용인 것 같다며 상황을 전했다. 이 당시의 상황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우루과이 대 가나의 경기에서 알게 되었는데 FIFA가 이번 월드컵 8강전에서부터 인종차별을 근절하자는 선언문을 경기에 앞서 양팀 주장이 낭독하게 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대 브라질의 경기 시작 전의 상황은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아서 정확히 모르겠는데 우루과이 대 가나의 경기에서는 "SAY NO TO RACISM"이란 플래카드도 등장했고 양팀 선수들이 서로 섞여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특히 가나 선수가 월드컵 무대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하자는 선언문을 낭독했던 것은 의미가 컸다고 생각한다. FIFA의 전달내용을 현지에 있는 SBS 관계자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캐스터만 미처 몰랐던 것인지 알 수는 없겠으나 SBS가 이 경기의 중계를 위한 사전 준비에 상당히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 SBS가 자사의 수익을 위해 독점중계를 강행한 것도 그렇지만 충분한 준비가 뒤따르지 않은 독점중계는 시청자들의 불편과 불만을 높이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