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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청년들의 실제 음악과 목소리(114년전)

왠만한 드라마나 영화보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서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었다. 지난 일요일 저녁 KBS1 TV에서 방송된 "KBS 스페셜, 114년 전, 한국인의 목소리" 얘기다. 원통형 음반에 담긴 목소리 얘기였기에 원통형 포장지에 담아 "Once You Pop, You Can't Stop!!!"이란 문구로 호기심을 유발했던 광고문구처럼 한 번 시청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게 만든 방송이었다. 흠 잡을 데 없는 깔끔한 편집과 연출로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을 본 것 같다. 'KBS 스페셜'이 이렇게 흥미진진한 방송이 될 수도 있다.

114년 전 조선시대 사람들의 목소리의 원형과 그 당시에 불렸던 진정한 한국 노래가사와 멜로디까지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되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덤으로 미국으로까지 건너 가 노래를 녹음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도 엿볼 수 있으니 열 일을 제치고서라도 시청할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오히려 한국인이라면 이 방송은 일부러라도 찾아서 시청해야 할 방송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이 방송의 유일한 옥에 티는 방송이 끝난 지 12 시간이 넘도록 다시보기 파일을 올려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보기를 통해 방송에서 조선시대 사람이 불렀던 노랫가사를 기록해보려고 했던 내 계획에 결국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한꺼번에 몰아서 기록하기보다는 방송에 나온 순서대로 글의 진행과는 상관없이 나열해 놓을 생각이다. 한 번 다시보기를 하면서 급하게 기록한 것이라 몇 개의 오, 탈자가 생겼을수도 있다.



서가의 길이만 850킬로미터가 넘는 세계 최대의 도서관인 미국 의회도서관 지하 2층의 수장고에서 발견된 원통형 음반 6개, 초창기 에디슨식 축음기로 녹음된 이 원통형 음반 6개에는 미국의 인류학자 앨리스 플레처가 1896년 7월 24일 녹음한 3인의 조선인이 평범한 목소리로 부른 10여분 분량의 노래 11곡이 담겨있다. 노래를 부른 조선인의 이름은 Jong Sik Ahn, He Chel Ye, Son Rong 이라고 적혀있을 뿐이다.

바람아 부지를 말아라
만경화가 싹 떨어진다
○○○○난지
나오 계신 ○○에야
비가 오시려는지
만수산에 구름이 진다

이 원통형 음반을 발굴한 사람은 메릴랜드 대학교 음악학과 교수이며 대표적인 한국음악 전문가 로버트 프로바인 교수였다. 하버드대학 음대를 졸업한 후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던 시절(1967~1968) 우연히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듣고 반해 한국음악과 한국문화를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한국 음악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제자들에게 북이나 장구의 장단을 가르치고 있다.

지하 서재에 螢雪硏究所(형설연구소)란 명패를 달아 놓았는데 '열심히 공부하는 연구소라는 뜻으로 저한테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아서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이 노교수가 15년전 도서관의 목록을 뒤적이다 음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Jong Sik Ahn, He Chel Ye, Son Rong 이런 메모와 함께 발견된 음반 6개 중 일부는 파손되었고 약 10분 분량의 한국인 목소리가 담겨 있다. 프로바인 교수는 전문 가수들이 아닌 조선인들이 어떻게 1896년도에 워싱턴DC에서 녹음하는게 가능했는지 의문을 갖고 외롭게 추적을 시작한다.



남풍기우 기역
해오리 기운 예로다
삼각산 제일봉에
부안개 안져 울고
한강수 깊은 물에
파도 용마가 낫단말가
대장간은 오날 날에야
아니로다 어 허니아
와화 몽중에나
만나볼까
○○○○ 아해들은
맥교지상에 하날 날아
꾀꼬리 나지 아니로다
황금갑옷을 떨어입고
제비중을 넘으랴고
고대광실 범길러라
키우던 양을 세울까나
'Patriotic Song', by Jong Sik Ahn

프로바인 교수가 안내한 곳은 비운의 혁명가 변수(邊燧, 1861 ~ 1892)의 비석이다. 변수의 비석은 원래 있던 것과 2003년도에 새로 세워진 비석이 함께 있다. 변수는 1884년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고 1887년 메릴랜드 대학에 입학해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생이 된다.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1891년 6월에 졸업한 변수는 그 해 10월 22일 학교 앞 역에서 기차에 치어 삶을 마쳤다고 한다. 비운의 혁명가 변수의 일생을 미국인 노교수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니 기분이 참 묘해진다.

산도 들도 물도 좋네
무얼 싸갖고 여기 왔나
'Ar-ra-rang 1', by Jong Sik Ahn, Son Rong

프로바인 교수는 지난 1998년 한국을 방문해 이 음성기록의 존재를 한국의 학자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녹음상태가 열악하고 비전문가의 창법이라는 이유로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정창관씨였는데 한 때 서양음악 애호가였으나 25년전 문득 국악음반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명사십리 해당화여
가난을 쫓아서 ○○○나
한강수에 ○○○○
이리 저리로 왕래하네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요
아라랑 아라셩 아라리야

이팔방년 소년들은 ○○
○○○○ ○○○ ○○
'Ar-ra-rang 3', by Jong Sik Ahn, He Chel Ye

정창관씨는 미 의회 도서관에서 음성기록을 복사해 와서 이 음원의 복원을 시작했고 사비를 털어 복각판 3000장의 씨디를 만들어 전국에 무료 배포했으며 미국의 프로바인 교수에게도 보내졌다.



한편 프로바인 교수는 추적을 계속하던 중 오래 된 신문기사를 검색하다가 마침내 단서를 찾아낸다. 녹음이 이루어지기 두 달 전인 1896년 5월 8일자 워싱턴 포스트지 기사였다. 7명의 한국학생들이 하워드대학교 사교모임에서 진정한 한국 음악을 불렀다는 내용의 기사다.

프로바인 교수는 지난 해 겨울 교환교수로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6개월을 보냈는데 여기서 한국현대사 연구가인 이완범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프로바인 교수가 들려주는 한국인의 가장 오래된 목소리를 들은 이완범 교수는 세계 음악계의 거장 세계적인 석학의 외로운 연구를 돕고 싶다는 심정으로 미국인 노교수의 추적에 뛰어들게 된다.

후손들이서 동구 밖을
○○○○○○○○○○
지경이로다
좋구나 매화로다
에야 데야 에헤야
에여라 지경이로다
좋구나 매화로다
'Blooming Plum Tree Song', by Jong Sik Ahn

이완범 교수는 녹음이 이루어진 1896년 당시 워싱턴에서 주미공사로 근무했던 서광범의 비문에서 단서를 찾아내고 조선정부가 최초로 파견한 조선유학생들에 관한 논문을 쓴 박찬승 사학과 교수와 일생동안 미국에 산재해 있는 한국 자료를 발굴해 온 방선주 박사에게 도움을 청하며 감추어진 역사속의 퍼즐 조각을 맞추어 나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 말, 격변하는 시대의 풍랑을 맞아 일본으로 미국으로 휩쓸려야 했던 조선청년 3인의 파란만장한 운명이 어느 정도의 윤곽을 드러낸다. 목소리를 남긴 3인은 1895년 고종이 일본으로 파견한 조선 최초의 관비유학생 안정식, 이희철, 송영덕이었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파견된 최초의 일본유학생들이었던 그들은 조선에서 아관파천이 일어난 지 보름만에 미국으로 도주했다.

하워드대학교 1896년 연례보고서와 어느 기독교 단체의 기록물 Congregationalist의 기사들에서 목소리를 남긴 안정식과 이희철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학교생활을 흐릿하게나마 알 수 있다. 하워드대학교 연례보고서 중에 "7 penniless Koreans"란 말이 미국에서 그들의 고단한 삶의 한자락을 대변해주는 것도 같다.



워싱턴 생활에 적응해 가던 어느 날, 안정식, 이희철, 송영덕은 플레처 여사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워싱턴에 처음 나타난 조선인 유학생들은 미국 원주민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플레처 여사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고, 플레처 여사의 요청에 3인의 조선 청년들은 이 날 한국인 최초의 음성기록을 남겼을거란 추측을 한다. 아래의 노래를 재연배우가 부르기 시작하다가 원래의 목소리인 이희철의 음성으로 넘어가는 장면은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한다.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후여 흑운을 무릅쓰고
백운을 박차고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후여 그물을 둘쳐 매고서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복희씨(伏羲氏) 맺은
그물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월도천심 야삼경에
청천에 뜬 저 기러기를
제비만 여겨서
후리러 나간다 후여
방울새 떼랑
후리러 나간다
'Catching the Swallows', by He Chel Ye

114년 전 미국에서 남긴 조선청년들의 목소리가 올해부터 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재로 채택되었고 기존과는 다른 연구들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 이 음악에 학자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프로바인 교수가 처음에 이 음악의 존재를 한국학자들에게 알렸던 때에 비하면 그나마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월아 네월아 가지마라
장안호걸이 다 늙는다
에야 데야 에헤야
에람마 둥개 얼싼이로다
○성 열차 동구밖에
울음을 울던 저 각시
○호 ○○가 기적이란다
좋구나 매화로다
에야 기적이 울어라
좋구나 매화로다
'Mile Man Song', by Jong Sik Ahn

한편 정창관씨는 미국에 정착해 목소리를 남겼던 조선청년들의 그 후 일생을 쫓기 시작하는데 목소리를 남긴 3인 중 부친의 이름까지 나와 있는 유일한 인물 이희철의 후손을 찾아낸다. 이희철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기전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일본에 있는 미국공사를 만나서 일종의 신원보증서를 작성한다. 고종의 정치고문이었던 알렌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오해를 피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격변의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희철은 귀국한 후에 일체의 재산을 정리해서 중국 만주로 들어가 영국인과 무역업을 하다가 그 당시 만주에 횡행했던 전염병에 걸려 50세를 일기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다시 중국대륙으로 전전해야만 했던 격변의 시대를 살아냈던 이희철의 무덤을 찾아 114년 전 미국에서 남겼던 고인의 음성이 기계를 통해 흘러 나온다.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후여 흑운을 무릅쓰고
백운을 박차고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후여 그물을 둘쳐 매고서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복희씨(伏羲氏) 맺은
그물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월도천심 야삼경에
청천에 뜬 저 기러기를
제비만 여겨서
후리러 나간다 후여
방울새 떼랑
후리러 나간다
'Catching the Swallows', by He Chel Ye

114년전 시대의 격랑을 피해 미국으로 떠났던 조선의 청년들, 아직도 나머지 2인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은 채 한국인의 가장 오래된 목소리는 미의회도서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 미의회도서관 수장고에서 원통형 음반을 꺼내오면서 시작되었던 프로그램은 이 음반이 다시 미의회수장고에 갇히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긴 여운을 남기게 된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리뷰에만 충실했다. 여기에 개인적인 감정을 보태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다. 이 프로그램, 꼭 시청해야할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