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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여우누이뎐' 죄 진 자들은 꽁꽁 숨어라

이전 글에서 나는 주목할만한 한마디로 아래에 있는 윤충일의 말을 꼽았다.

"연이가 불쌍합니다. 나으리를 좋은 사람이라고 믿은 연이가 불쌍하다고요."

드라마 '여우누이뎐' 9회는 매 장면 장면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의미가 컸기에 이전 글은 각각의 장면을 순서대로 나열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내 언어로 요약하기보다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를 그대로 옮겨 놓는 방식을 선택하느라 글 전체가 중언부언해진 측면이 있었다. 그러면서 정작 글을 쓰고자했던 주제는 뒤로 밀리고 축소되었지만 그렇다고 글을 몇 개로 나누어서 쓸만한 여유는 없었고 하나로 뭉뚱그려야 했기에 나름대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위에 적시해놓은 충일의 말을 글의 말미에 옮겨 놓으면서 주목할만한 한마디라고 언급했었는데 글의 조회수와 추천수를 보면 위의 말이 왜 주목할만한 한마디라고 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글을 읽은 사람은 몇 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글 말미에 이렇게 운만 떼고 말았던 이유는 글을 나눌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 외에도 더 있지만 굳이 글로 언급할만한 내용은 아니라 생략한다.

드라마 '여우누이뎐' 10회에서 구미호는 드디어 윤두수 일가에 복수를 시작했다. 그런데 화면상으로는 자극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았지만 구미호가 선택한 복수의 방법은 정말로 잔인한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구미호가 윤두수에게 당한 그대로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인간들끼리 서로간의 믿음을 배신하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정신을 서서히 황폐화시켜 나가는 방법으로서 그 어떤 자극적인 화면보다도 훨씬 더 잔인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구미호가 어떤 방법으로 윤두수 일가에 대한 복수를 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다름아닌 충일의 입을 통해서 흘렸던 것이다.



윤두수는 사냥을 나갔다가 여우의 습격을 받고 폐가에서 깨어나는데 벽에 연이가 그려놓았던 구미호의 그림이 눈에 들어오자 놀라게 된다. 밖으로 나오다가 구산댁을 만나지만 구산댁은 전혀 윤두수를 기억하지 못하는척 연기를 하고 그런 구산댁을 믿지 못하는 윤두수는 연이가 죽었던 동굴로 구산댁을 데리고 가 연이가 죽은 흔적을 보여주면서까지 구산댁을 시험해 본다. 그러나 구산댁은 능청스런 연기로 자기에 대한 윤두수의 경계심을 풀게 만들고 윤두수는 결국 구산댁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이를 본 양부인은 기가 막히고 구산댁에게 속고 있는거라고 윤두수에게 말하지만 윤두수는 초옥이가 살았으니 구산댁을 거둬주는게 도리라 할 뿐 양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양부인은 윤두수가 연이를 살해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지만 윤두수는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못을 박는다. 양부인은 계향을 찾아가 구산댁이 발톱을 드러내면 충일, 충이도 무사하지 못할거라 겁박하면서 구산댁이 기거하는 방에 초옥이를 음해하는 비방전을 붙이는 계략을 꾸민다. 그 비방전이란 연이를 제물로 삼기 위해 만신이 처음 해주었던 비방과 동일한 것이다.

양부인은 윤두수를 구산댁의 방으로 데리고 와서 보여주려고 하지만 그 비방전은 이미 천우가 양부인의 방으로 옮겨버린 상태다. 윤두수로부터 헛것이 보이냐는 타박을 들은 양부인은 자기 방으로 돌아오는데 거기에 양부인이 계향을 시켜 구산댁의 방에 붙여 놓았던 비방전이 붙여져 있다. 그리고 양부인의 보료 위에는 罪必償이라고 피로 쓴 듯한 글씨도 함께 놓여 있다. 위 한자 니(이)죄필상은 양부인의 죄를 반드시 갚아주겠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이는데 양부인이 구미호 모녀에게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대로 되갚아 주겠다는 의미로 선택한 용어라고 판단된다.



양부인은 윤두수로 하여금 구산댁을 집에서 내보내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음인지 구산댁을 불러 윤두수가 연이를 갈갈이 찢어 죽였고 연이의 간을 초옥에게 약으로 먹였다고 한다. '어미라는 것이 지 새끼가 어찌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니 새끼 죽일 궁리나 하는 사내에 빠져서 결국 니 새끼를 사지로 내몰았다'며 어미로서의 자격이 있느냐고 모욕하고 더 이상 윤두수 곁에 붙어 있지 말고 알아 들었으면 나가서 자결이라도 하라고 한다.

양부인은 구산댁이 돌아온 것은 초옥을 해하기 위함이라고 직감한듯하고 어떻게든 구산댁을 집에서 몰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구산댁을 몰아내자고 자기 딸의 초상에 연이를 죽이기 위해서 써먹었던 것과 동일한 비방전을 그려놓고, 자식을 죽인 장본인이 누군가에 대해서 세세히 각인시키며 모욕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양부인은 어떤 한가지 목적에 함몰되어 다른 것은 전혀 생각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유하고자 함인가.

한편 여기에 구미호가 복수를 하게 될 방법에 대한 다른 단서가 있다. 양부인은 구산댁에게 "너는 니 새끼를 죽였지만 난 내 새끼를 지켰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닥친다해도 난 우리 초옥이를 지킬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당장 나가라. 어미로서 양심이라도 있다면 나가서 자결이라도 하란 말이다."라고 소리를 치는데 양부인은 초옥에게 무슨 일이 닥쳐도 과연 초옥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와 끝내 지키지 못한다면 그 죄책감으로 스스로 나가서 자결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놓았으며 이를 둘러싸고 양부인은 시험에 들게 될 것이다.

구산댁은 양부인에 대한 첫번째 시험을 실행에 옮겼다. 초옥은 누군가가 마루 위에 올려놓은 설당과자를 먹고 사라지고 양부인은 초옥을 찾아 나서지만 천우에 의해 연이가 죽어갔던 칠성판 위에 결박되어 눕혀져 있다. 여기에 구산댁이 나타나서 관 속에 넣어둔 초옥을 양부인에게 보여주고 관을 끌고 나가면서 양부인에게 말한다. "어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새끼를 지켜야한다. 헌데 지금 어찌 내게 사정을 하는가 너도 어디 한 번 니 새끼를 잘 지켜 보거라. 새끼가 위험에 처하면 물불 안가리고 지켜내는게 어미 아니겠느냐." 칠성판에 묶여 초옥이가 죽어 나가는데도 꼼짝을 할 수 없는 양부인은 어미 구미호와 새끼 연이의 심정을 손톱만큼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 다른게 인간 아니던가.



구산댁은 윤두수를 유혹해 구미호의 도술을 부린 술잔을 마시게해서 정신을 잃게 한다. 윤두수는 구산댁이 자기를 땅에 파묻는 악몽에 몸부림치다가 정신을 차린다. 이 때 칠성판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양부인이 돌아 와 구산댁에게 초옥을 데려오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연이는 제 방에서 밥을 먹고 있고 괜찮으냐는 양부인의 물음에 그저 자다가 일어난 것 뿐이라 말한다.

윤두수는 양부인을 불러내고 왜 내 말을 믿지 않느냐는 양부인의 말에 구산댁 하나 몰아내기 위해 자해까지 하느냐고 묻는다. 윤두수는 양부인에게 투기에 눈이 멀었다 말하며 양부인이 이미 한차례 윤두수를 기망하고 능멸했다는 것을 되새기며 더 이상은 그냥 참고 넘어갈 수 없으니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이 때 구산댁이 들어와 양부인을 용서해달라며 차라리 구산댁이 스스로 나가겠다고 읍소한다. 이러한 구산댁을 지켜보는 양부인의 기가 막힌 표정이 참 가관인데 구산댁이 윤두수에게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양부인도 구산댁과 연이에게 했었던 짓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생각해봤을까 싶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초옥은 양부인이 자리에 눕자 윤두수를 찾아 와 자기가 먹었던 약인 호랑이 간을 구해다달라고 부탁한다. 밖으로 나가다가 초옥은 지나가는 아낙을 붙잡고 자기가 먹었던 호랑이 간을 구해오라고 하지만 아낙은 호랑이 간은 전국팔도를 다 돌아다녀도 구하기 힘든 것인데 초옥이 그런 호랑이 간을 먹었다는 것은 잘못 안 것일거라고 말한다. 의문을 안고 돌아오는 초옥 앞에 연이가 나타나 초옥이 진짜로 뭘 먹고 병이 나았는지 말해 주겠다며 끌고 가 우물에 빠뜨린다. 물 속에서 발버둥치는 초옥을 내려다보며 연이는 "어디 한 번 실컷 발버둥쳐 봐라. 니 년이 죽을 때까지 내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라고 중얼거린다. 간신히 물 위로 올라와 쳐다보며 왜 이러냐고 묻는 초옥에게 연이가 외친다. "니가 내 간을 먹었잖아? 내 간 내놔. 내 간 내놔."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연이가 환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연이는 천우에게 초옥을 우물로 끌고 가고 우물에 빠뜨리라고 눈짓을 하고 천우는 연이의 눈짓에 따라 그대로 실행을 한다. 구미호는 연이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양부인에게서 듣고 절규하는데 이 때 구미호의 옆에 연이가 나타나 구미호의 볼을 어루만지려고 하지만 구미호는 옆에 있는 새끼 연이를 보지 못한다. 어미 구미호도 보지 못하는 새끼 연이를 사람인 천우가 보았을리는 없다. 이것은 어미 구미호가 둔갑술을 부려 새끼 연이로 변신했고 천우는 연이가 아닌 구산댁을 본 것이고 구산댁의 지시대로 행동했을거라고 봐야 한다. 구산댁은 그렇게 연이로 둔갑해서 초옥에게 연이의 간을 먹고 살아났다는 것을 알려주어서 초옥이 괴로워하게 만들고 그런 초옥을 지켜봐야하는 윤두수와 양부인을 괴롭히려고 했을 것이다.

만신이 죽은 연이를 곧 만날 것이니 몸조심하라고 구산댁에게 전해달라고 윤두수에게 말을 한 것은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만신 역시도 꼬리가 길면 밟힐 것이라는 사실이고 윤두수 내외도 마찬가지로 꼬리가 길면 밟히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누가 꼬리를 밟게 될 지는 아직은 언급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좀 더 웃기는 사실은 만신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면 윤두수는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다는 것이고 구미호 모녀는 죄가 없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종보복(同種報復)을 계획하고 있다. 물론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만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 이 드라마 '여우누이뎐'이 끝나는 순간이 될 것이겠지만 아무튼 "죄 진 자들은 꽁꽁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그렇게 숨어서 죄책감으로 인한 망상에 시달리든가 자수하여 광명찾든가 작가의 선택이 궁금하다.

드라마 '여우누이뎐' 10회는 각 장면마다 의미가 커서 한 장면도 빼고 언급할 수 없었던 9회와는 달리 상당부분 스토리 전개가 밋밋했던 것 같다. 10회에 등장했던 각각의 에피소드는 실제 구미호가 존재했었다는 것보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간들의 망상에 불과한 것 같다. 호랑이 간을 먹고 살아나게 되었다고 믿었던 초옥이가 자기가 먹었던 것은 호랑이 간이 아니라 실은 연이의 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은 빙의망상에 시달리게 된다는 그런 결말일수도 있겠다는 이전의 글과 동일한 취지로 봐줘도 무방할만한 내용으로 채워진 10회 방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