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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시사현장 사회

쌍용차 구사대, 그들은 무엇을 구했을까?

'함께 살자' 또는 '정상 조업'. 이 중에서 어느 쪽이 옳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왜 그들을 '산 자'와 '죽은 자'란 자극적인 말로 편을 갈라놓으며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게 만들었을까? 왜 한쪽은 스스로 '사측의 개'라는 자조적인 말을 사용하면서까지 한 때 동료였던 사람들을,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생수마저 빼앗아 길바닥에 쏟아부으며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했을까?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명멸을 반복한다.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흥정하고 인간의 본성마저 황폐화시키며 이용하는 자본의 비열하고 악랄함에 구역질이 난다.

쌍용차 구사대, 그들은 과연 회사를 구했을까?

살인과 다를 바 없는 폭력과 야만을 동원해서 노동을 무릎 꿇렸다고 쌍용차가 회생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쌍용차가 회생할지는 채권단과 정부의 의지에 달린 것이지 살아남은 노동자들의 의지와는 무관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쌍용차가 파산 절차를 밟는다면 그것 또한 채권단과 정부의 의지인 것이지 '죽은 자'들의 책임은 아니다. 사측과 정부는 그냥 적당히 책임을 떠넘길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사실 쌍용차가 이 지경까지 온 것도 사측과 정부의 책임이었지 노동자들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놓고 노동자들끼리 서로 침 뱉고 돌을 던졌던 것이고 사측과 정부가 받아야 할 비난까지도 고스란히 떠안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노동이 자본에 무릎 꿇은게 아니라 노동이 자본에 의해 분열되고 분열된 노동에 의해 노동이 패배했다는게 맞겠다.

쌍용차 구사대, 그들이 어쩌면 이번 사태의 실질적인 피해자다. 그들이 구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잃은 것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동료를 잃었고 인간성을 잃었다. 동료를 죽음으로 밀어넣으려고 했고 그 가족들의 울부짖음마저 외면하며 폭력을 휘둘렀던, 잠시나마 황폐해졌었던 자신의 야만적인 인간성을 떠올리며 괴로워해야하는 아픈 기억만이 남을 것이다.


(자본과 그 입들은 이 사진만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흥분이 가라앉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이 자본에 그리고 그 자본의 입인 조선일보에 어떻게 이용을 당했었는지, 노동자의 편이 되주겠다던 민주노동당은 그들로 인해 어떻게 매도당했는지 반추해 볼 필요는 있겠다. 자본의 입인 조선, 동아는 벌써 쌍용차 노조 자체를 폐쇄해야 한다고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승리감에 도취된 자본의 본모습일 것이다.

자본과 그 입들은 아마도 에어컨 잘 나오는 시원한 방에서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앞장서는 쌍용차 구사대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편안하게 앉아서 손에 피 한방울 안 묻히고도 철저하게 노동자들을 유린했고 괴로워하는 그런 노동자들을 보면서 느긋하게 즐겼을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들끼리 분열되어 서로 모욕하며 죽일듯이 싸우게 만든 자신들의 공로를 서로 치하하며 축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뇌까리며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 '새끼들, 까라면 까지 뭔 말이 많아? 꼭 패야 말을 듣냐?'


(너무도 비인간적인 그래서 구역질나는 이 메시지는 마치 살아남은 노동자들을 향한 조롱같다)

쌍용차 구사대는 '산 자'나 '사측의 개'라는 자조적인 말로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함께 살자'던 동료들을 비난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자본과 정부의 잘못이지 양쪽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하는 것이야말로 온전히 자본에 패배하는 것임을, 완전한 '자본의 개'가 되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젠 서로가 서로를 향해 증오하고 할퀴었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남았는데 결국 그것도 '산 자'와 '죽은 자'가 떠안아야 할 몫이다. 자본이나 정부 그리고 자본의 입들이 '산 자'들을 위로하고 배려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사치다. 그들에게 일말의 연민이나 양심이라는게 있었다면 사태를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기회만 오면 언제든지 지금 '살아남은 자'들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고 악어의 눈물을 흘릴 교활함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