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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시사현장 사회

ISD 뺐어도 호주 정부를 압박하는 담배회사




다국적 기업인 필립모리스가 지난 21일 홍콩 지사인 필립모리스아시아를 통해 호주 정부에 중재 통지서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필립모리스 대변인은 호주의 새 법안 때문에 수십억 달러의 손해를 볼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호주 정부를 상대로 호주 고등법원에 소송을 낼 계획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공교롭게도 22일 한미FTA 비준안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그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상당히 민감한 시점에 이 사건이 다시 부각되게 되었다.

호주 정부와 다국적 담배회사간에 공방이 벌어진 것은 지난 4월부터였다. 호주 정부가 "2012년부터 모든 담뱃갑의 포장을 칙칙한 황갈색에 똑같은 글꼴을 사용하는 것으로 통일하고 특정 담배 브랜드를 표시하지 못하게 한다(the logo-free, drab dark brown plain cigarette packaging)"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 초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호주의 이 법안에 따라 제조될 담뱃갑의 도안을 보면 담뱃갑만 보고서는 제조회사나 담배의 종류를 단번에 알아보기가 곤란한 듯하다. 담뱃갑에는 똑같은 글꼴로 작게 제조사 이름만 표시하고 담배회사의 로고를 비롯한 일체의 표식을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호주가 담뱃갑의 색깔을 칙칙한 황갈색으로 통일한 것은 '흡연자들이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색'이란 연구 결과 때문이라고 한다. 호주 정부가 이처럼 담뱃갑의 포장을 규제하는 것은 "담배 포장은 담배회사들이 새로운 흡연자를 '죽음의 상품'으로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주의 이러한 담뱃갑 통일 법안은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에서 알 수 있듯이 강력하다. 그래서 이에 반발하는 담배회사와 갈등을 빚었는데 호주 의회가 지난 10일(현지시각) 법안을 통과시키자 필립모리스도 칼을 뽑아든 것이다. 그러자 호주 정부는 "담배회사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우리도 국민 건강을 위해 싸울 것"이라며 소송불사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 사건은 주목해야 되는 사건으로서 호주 정부의 대응과 그 결과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사건은 전문가들이 예측하듯이 필립모리스가 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필립모리스의 시도는 타 국가들에 대한 일종의 시위성 전략일 것이라 판단된다. 한데 필립모리스가 패하더라도 ISD가 안심해도 된다는 인식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 미리 경계하고 충분히 대비하지 않으면 자칫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는 게 ISD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ISD, BIT, FTA

ISD는 영문으로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이다. ISDS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테지만 ISD가 일반적으로 쓰여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ISD로 언급한다. ISD에 대한 개념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여기서는 별도의 설명을 생략한다. 마찬가지로 BIT나 FTA에 대한 설명도 생략한다. 이하에서 영문 이니셜로만 설명을 이어가는 이유는 의도적으로 한글과 서로 혼용함으로써 일반인들의 혼동을 야기하려는 시도가 읽혀지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호주는 미국과의 FTA에 ISD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해서 한국의 반대자들은 호주를 예로 들면서 한국도 한미FTA에서 ISD를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필립모리스는 ISD 조항을 원용해서 호주 정부를 제소하고 나섰다.

반대자들의 주장에 이러한 오류가 생긴 것은 필립모리스가 우회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필립모리스는 미국과의 FTA가 아니라 호주가 지난 1993년 홍콩과 체결했던 BIT에 포함된 ISD 조항을 원용해서 호주 정부를 제소한 것이다. 즉 호주가 미국과의 FTA에서는 ISD 조항을 뺐지만 필립모리스는 우회적으로 홍콩지사를 통해 호주와 홍콩 사이에 체결했던 BIT의 ISD 조항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일전에 박근혜가 ISD는 세계적 표준이라며 한미FTA 찬성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손학규를 비롯한 야권에서는 BIT에서의 ISD와 FTA에서의 ISD는 서로 다른 것이라면서 박근혜에게 ISD가 뭔지 잘 모르면 공부 좀 하라고 비아냥거리며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한데 이번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BIT와 FTA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의 범위와는 별개로 ISD 조항 자체의 문제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EU와의 FTA에는 ISD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런 면에서 보면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회원국들로부터 ISD 권한을 위임받지 않은 EU 집행부와 체결한 FTA에서는 ISD가 포함되지 않았지만 22개국과의 BIT를 통해 ISD를 포함시켰고 어떤 식으로든 위협의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Aussie rules: Under the new law, cigarettes, pipe tobacco and cigars have to be sold in olive green packs free from branding. dailymail uk)

BIT와 FTA 어느 쪽이든 ISD는 독소조항으로 작용할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는 제도라고 봐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일방당사국에게만 특별히 유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한미FTA 반대를 목적으로 ISD가 유독 한미FTA에서만 독하고 다른 국가들과의 FTA나 BIT에서는 덜 독하다는 듯한 일부의 주장은 오히려 일반인들의 ISD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게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번 사건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과의 재논의를 통해서 한미FTA에서 ISD를 뺀다 하더라도 다국적 기업은 한국이 이미 FTA나 BIT를 체결한 여타 국가들에 있는 지사를 통해 해당국과의 협정문에 포함되어 있는 ISD를 원용함으로써 얼마든지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EU 집행부와의 FTA를 제외한 6개국과의 FTA에 ISD를 포함시켰으며 81개의 BIT에도 ISD를 포함시켰다.

즉, ISD는 유독 한미FTA에서만 문제인 것은 아니고 한미FTA에서 ISD를 빼더라도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ISD는 이미 국가간의 협정에서 표준 약관처럼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것을 일방적으로 무시해버리는 것이 이득인지 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편 필립모리스는 호주 정부가 금연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법안의 무효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는 공공정책은 FTA에서 예외라던 정부의 주장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물론 필립모리스가 국제상표권과 지적 재산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호주 정부의 금연 정책 자체에 제동을 건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한국 정부에서 공공정책은 FTA에서 예외라는 홍보 자료를 내놓는 것은 이처럼 원칙론적인 입장에서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호주의 이번 법안이 금연 정책의 일환인 것은 부인할 수 없으므로 정부의 공공정책이 외국 투자자에 의해서 제약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정부에서 한미FTA는 조건 등이 까다롭게 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결국은 정부의 공공정책이 외국 투자자에 의해서 위협받을 여지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정부의 주장대로 공공 정책 자체가 공격받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ISD는 국가가 투자자의 견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공공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정책의 합리성과 비례성(비차별성)의 면에서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영국 guardian에서 약 1년여 전에 실시한 poll 결과. 단순히 담뱃갑 포장이 금연을 유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호주의 담뱃갑 포장법에 따른 담뱃갑 도안은 끔찍한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이미 니코틴에 중독된 사람의 금연 효과는 불확실하지만 신규 흡연자를 줄이는 효과는 강력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유사한 법안은 미국(담배 회사들이 FDA를 제소한 상태)이나 영국 등에서 시도하고 있는데 다국적 담배 회사들의 시도는 결국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짐작된다.)


가령 한국 정부가 호주와 같은 금연 정책을 추진할 경우에는 호주와 같은 처지에 처할 개연성이 높다.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금연 정책 자체가 공격받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 정부가 마음대로 금연 정책을 추진할 수는 없다. 즉, 금연 정책에 합리성과 비례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범위 안에서 금연 정책을 추진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한도에서 금연 정책은 제약을 받게 된다.

정책의 합리성과 비례성은 ISD 분쟁의 판정 사례를 통해 판단할 수 있다. 필립모리스가 호주 정부를 제소하는 것도 정책의 합리성과 비례성에 관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담뱃갑의 포장을 통일적으로 규제하는 정책이 금연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고 브랜드마저 표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지적재산권을 불법 몰수하는 것으로 위조 제품이 유통될 수도 있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호주에서 필립모리스 담배의 시장 점유율은 46%라고 하는데 필립모리스로서는 브랜드마저 표시할 수 없도록 담뱃갑을 통일시키는 호주의 정책에 불만을 가질 만도 하다. 한데 필립모리스가 호주 정부를 제소한 것은 국제보건기구(WHO)에서 발효된 담배규제기본협약과 충돌할 수도 있다. WHO가 제정한 담뱃갑의 가이드라인을 정확히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필립모리스는 WHO의 담배규제기본협약에도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해서 WHO 사무총장이 다국적 담배 회사들에 맞서 국제사회가 뭉쳐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섬으로써 이번 사건은 더 흥미를 끈다.

ISD의 취지는 국제기구의 분쟁해결 절차를 통해 FTA를 체결하는 국가마다 법체제나 정책상황이 다른 데서 생기는 외국 투자자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투자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필립모리스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다국적기업이 이익을 위해 악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는 국제사회가 연합해서 대항함으로써 입지를 축소시키지 않는다면 FTA의 존립 기반을 위태롭게 할 지도 모른다.

결국 ISD로 인한 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외국 투자자에 대한 합리성과 비차별성을 갖는 정책을 추진하고 국제사회의 변화를 사전에 적절히 예측하고 이에 대한 예방 및 대응 능력을 키우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본다. 그러려면 국론의 분열이 아니라 합리적인 수렴이 동반되어야 한다.

한데 한국은 유독 한미FTA에서만 찬성하면 수꼴이고 반대하면 좌빨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권력욕에 눈 먼 정치꾼들이나 그 맹종자들에 의해 국론이 분열되고 있다. 향후 중국과 FTA를 체결하게 될 경우에는 현재와 똑같은 상황이 서로 편만 뒤바뀐 채 반복되는 비루한 꼴을 지켜봐야 할 지도 모른다. FTA와 같은 통상정책을 당리당략이나 이념적인 측면에서 편을 갈라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은 자멸행위와 같다.


(The logo-free, drab dark brown plain cigarette packaging which will replace current cigarette packaging in Australia.)

권력욕이나 당리당략 또는 이념에 의해서 국가의 정책이 좌우되고 국론이 분열된다면 ISD는 가공할 공룡으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국론을 합리적으로 수렴해서 예방과 대응능력을 키운다면 ISD는 과도한 공포심을 가질 만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ISD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식의 인식도 위험하고 경계하고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담배규제기본협약(FCTC, The Framework Convention on Tobacco Control)은 WHO가 흡연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와 국제협력을 위해 2003년 5월 21일 제 56차 총회에서 채택한 국제협약으로 2005년 2월 27일 발효되었다. 한국은 2005년 4월 동 협약에 비준했고 2012년에는 FCTC 당사국 총회가 한국에서 개최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도 FCTC 당사국 총회 개최에 즈음하여 FCTC 가이드라인에 따른 금연 정책과 제도를 서둘러 정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주는 강력한 금연 정책을 펴는 나라로 유명한데 호주에서 1983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담뱃세를 소비자물가지수와 연동하는 정책은 한국이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담뱃값을 일거에 인상하려는 정책은 국민의 건강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세수 확보만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꾼들의 속셈이 빤히 보이니까 반발심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 물가지수에 맞춰 담뱃값을 결정하는 정책은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덧) ISD와 관련한 것은 차후에 여유가 된다면 다른 포스트를 통해 더 언급해볼 생각입니다. 객관적이라 판단했으나 실은 주관적인 것일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길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짧은 시간에 글을 쓰다보니 불충분하거나 부적합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수도 있을 것입니다. 글을 읽되 이 글에서 선입견을 갖지 마시고 최대한 본인이 주체적으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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