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보상자 보기/엔터테인먼트

한예슬은 희생양인가? 명확한 입장표명을 할 때다




KBS 월화드라마 '스파이 명월'이 다행히 종영은 했다고 한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드라마가 이른바 애국가 시청률을 기록한 채 종영해버린 선례가 있었던가싶다.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다더니 그렇게도 시청자들의 기대를 높여 놓고 뚜껑을 열었지만 결국은 '소문난 호랑이 잔등 부러진' 최악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퇴장했다. 다만 '종영했다는 것에만 의미를 둘 뿐'인 드라마였지만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최고의 조합이라던 한예슬과 문정혁은 캐릭터 파악은 하고 촬영을 시작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들의 연기는 어설프고 부담스러웠다. 그 둘의 논란에 가려졌지만 주인아 역을 맡은 연기자 또한 자기의 캐릭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몸값만 비싼 이 주연 연기자들보다는 차라리 '돈지랄이 좋긴 좋네'라던 주인아의 코디인 주경주역을 맡은 생초짜의 연기가 훨씬 더 나아 보일 정도였었다. 이를테면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는 대본보다는 연출에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드라마 촬영 중에 여주인공이 촬영장을 무단 이탈한 이른바 '한예슬 사태'는 인터넷을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그러는 과정에 이 사건의 의미도 아리아리해졌다. 향후 유사한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나 책임소재는 명확히 하지 않고 관련 당사자들끼리 미봉지책으로 봉합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버리면 그만이라는 선례만 남긴 것은 아닌지 시청자의 한사람으로서 그저 씁쓸할 뿐이다.

이른바 '한예슬 사태'는 위기에 처한 시스템이 자기방어를 위해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시스템과 이해관계가 직간접적으로 걸려 있는 당사자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또한 대중들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보기엔 매우 좋은 케이스였다고 할 수 있다. 자기의 이익을 저울질하며 다양하게 반응하는 여러 군상들은 어쩌면 매스 미디어 시대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비겁하거나 야비했던 자들 또는 터무니없는 억측을 퍼뜨리며 조회수를 올려 껌값 정도를 건진 자들, 그들은 다소의 소득이라도 건졌을까?

시청자와의 약속? 광고주와의 약속이겠지!

'시청자와의 약속이 최우선인데 한예슬은 그것을 어겼다.' 아마도 이 말은 한예슬 사태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대중의 인기로 먹고 사는 연예인을 궁지로 몰아넣기에 이보다 더 그럴싸한 구실이 있을까싶다. 사실 한예슬 사태는 이 한마디로 상황이 종료되었고 그 때에 이미 한예슬이 던진 무리수는 설령 그것이 아무리 정당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실패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한예슬이 드라마 촬영 현장을 이탈한 것이 과연 시청자와의 약속을 어겼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배우는 제작 현장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극단적이고 가학적인 말을 마치 철칙처럼 언급하고 비교의 대상이 아님에도 비교해 가면서 한예슬을 비난했던 데는 드라마는 절대로 결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제작자나 연기자들이 상기한 것처럼 드라마 제작에 임하는 것은 그들의 각오와 자세로 봐야 하는데 그것을 시청자와의 약속이라고 분위기를 몰아가는 것은 넌센스라고 생각된다. 시청자와의 약속은 드라마의 수준과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제작하고 방송하는 것이어야 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연기자가 드라마 제작 현장을 떠났거나 기대치에 이르는 드라마를 제작하지 못했다면 결방을 하더라도 제대로 만들어서 방송하는게 더 낫고 그게 시청자와의 약속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들이나 동료 연기자들이 시청자와의 약속을 언급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는데 방송이 이런 이유를 들어 한예슬을 코너로 몬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 시청자와의 약속을 밥먹듯이 어기고 아예 무시하기까지 해왔던 건 오히려 방송사였다. 시청률이 안 나온다 싶으면 서둘러 조기종영하고, 시청률이 잘 나온다 싶으면 처음에 예고했던 분량에 가까울 정도의 연장방송까지 해왔던 방송이 시청자와의 약속을 주워섬기고 그것을 무기 삼아 공격을 하고 나선 것은 가관이다.

일례를 들면 일전에 모 방송사에서 끝난 '황당한 막장 드라마'가 있다. 아무리 막장이라는 비난을 쏟아내도 꿋꿋이 연장방송을 결정했었고 황당한 설정으로 시청자의 비난이 폭주했을 때에는 드라마 작가와의 계약 해지를 언급하며 시청자의 비난을 피해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슬그머니 '최고의 화제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드라마를 홍보하고 출연 배우들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아마도 연말이 되면 관련자들은 수상도 하게 될 것이다. 막장의 대가라 불리는 작가의 드라마를 동시간대 후속 드라마로 예고하고 있는 방송사가 시청자와의 약속을 언급하는 것은 황당할 뿐이다.

드라마 '스파이명월'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이 드라마는 KBS 극본공모 당선작이고 해당 작가가 대본을 쓰는 것으로 홍보를 했었다. 하지만 시청률이 낮아지자 슬그머니 작가를 교체해버렸다. 알려진 바로는 후속 드라마 일정에 맞춰야 한다는 이유로 방송사가 분량을 늘렸다고 하므로 극본공모 당선작이라고만 보기도 힘든데 방송사가 일방적으로 대본의 분량을 조정하고 단순히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작가를 교체한 것은 시청자를 무시하는 방송의 일방적인 횡포다.



내가 드라마 작가가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조금 지나서였는데 그 때 나는 미련없이 채널을 돌려버렸다. 내가 보려고 했던 것은 KBS 극본공모 당선작을 쓴 작가의 드라마였지 중간에 다른 작가가 끼어들어서 바꿔 놓은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시청률만으로 평가해서 일방적으로 작가를 교체해 놓고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하는 것은 궤변이다. 내가 이 드라마에 등을 돌린 가장 큰 이유는 드라마의 문제가 아니라 시청자와의 약속을 어긴 방송사 때문이다.

한예슬 사태가 불거지자 방송이 시청자와의 약속을 들먹이며 주연 여배우를 교체해서라도 드라마 제작을 이어가겠다고까지 드라마 제작에 집착한 것은 시청자와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광고주와의 약속 때문일 것이다. 방송이 일방적으로 작가를 교체하고 조기종영이나 연장방송도 불사하고 결방을 못하는 것도 결국은 광고주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지 시청자와의 약속 때문은 아니다. 방송이 그렇게 하기에 내세울 매우 좋은 구실이 시청자와의 약속이다.

제작 현장보다 시청률이 더 심각한 문제다

한예슬 사태로 예전부터 제기되어 왔던 드라마 제작 현실의 열악함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들 중의 대부분은 연기자나 스탭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엑스트라들일 것이다. 대략 5~6만원짜리 일당을 받는 이 사람들은 거의 인간적인 대우조차 못 받고 일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당으로 환산하면 대략 4~500만원에 달하는 한예슬이 제작 현장의 열악함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공감을 얻을 수 없는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드라마 제작 현장보다는 단지 시청률만에 의해서 방송이 일방적으로 작가를 교체하고, 캐릭터와 대본 그리고 결말까지도 결정되고 변경되어지는 현실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게 결국은 재미만 있으면 모든 게 다 용서가 된다는 천박한 인식이 팽배하게 만들어 질 낮은 드라마가 판을 치게 만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근래에 퓨전사극이라는 미명하에 막장을 넘어 아예 패륜화되다시피 한 사극이 안방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막장 드라마의 대가라 불리는 임성한이나 문영남 같은 막장 드라마 작가들만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번의 '스파이명월'처럼 KBS 극본 공모에 당선된 드라마임에도 단지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가차없이 교체된다면 다소 욕만 먹으면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막장 대본을 써서 시청률을 올리는 작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 드라마가 질적으로는 저하되고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가 생산되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시청률이 광고주들의 편의를 위한 자료로 활용된다는 것은 순전히 핑계라고 본다. 광고주들이 시청률이 아니라 드라마의 수준과 완성도를 보고 광고 타겟을 결정하게 만들어도 충분하다. 근거도 모호한 시청률만을 근거로 삼아 질 떨어지는 막장 드라마에 광고한 비용을 시청자들이 어쩔 수 없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합리하다. 시청률을 측정하고 비교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쪽대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제작 현장 개선도 여의치는 않을 거라고 본다.

한예슬은 희생양인가? 명확한 입장표명을 해야 할 때다

드라마 촬영을 거부하고 돌연 LA로 출국한 한예슬은 '드라마 환경이 너무 힘들었고 모든 걸 내려놨다'고 비장한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이틀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공항에서 여전히 드라마 제작 환경의 열악함을 역설하며 '나 같은 희생자가 다시 나오지 않아야 하고 스스로 옳은 일을 했다'고 했었다. 그런데 드라마 촬영 현장에 복귀한 한예슬은 제작진들에게 '나를 배척한다고 생각했는데 다 내 오해였다'고 말을 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예슬의 이러한 행동은 드라마 '스파이명월' 스태프 및 연기자들이 밝힌 '한예슬 사건의 전모'라는 제목의 성명서 전문에 나와 있는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시인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성명서에 나와 있는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과연 한예슬이 드라마 제작 환경의 열악함을 역설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또한 북한사투리는 이 드라마에서 작가가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판단되는데 드라마에서는 겨우 '간나새끼' 정도로만 묘사되었다는 것은 한예슬의 입김이 상당했다는 방증일 텐데 드라마 제작을 거부하고 출국할 정도로 제작진에게 불만을 가졌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다.

한예슬은 지금 '그냥 조용히 지나가고 싶다'고 침묵하고 있을게 아니라 희생양이라고까지 언급하며 드라마 제작 현장의 열악함을 역설했던 것과 관련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해야 할 때다. 드라마 제작 환경의 열악함을 알리기 위해서 드라마 촬영을 거부하고 출국을 했던 것인지, 제작진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으로 출국한 교만한 여배우의 돌출행동이었는지, 그랬다가 수백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이 겁나서 돌아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것인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드라마 제작 환경의 열악함을 역설한 것인지, 이번 사건의 희생자인지 아니면 가해자인지, 여전히 스스로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 명확히 정리하고 가야 한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는 시청자가 있다. 한예슬이 태업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도 시청자를 볼모로 한 것이고 시스템의 맞대응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시청자를 등에 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의 사건은 한예슬이 조용히 지나간다고 시청자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것 같지는 않다. 한예슬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생각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거라면 이 부분들을 시청자들 앞에 나서서 명확히 밝히는 데서부터가 시작점이 될 것이다. 한예슬이 시청자와의 약속을 어겼다면 촬영장을 무단 이탈했다는 것이 아니라 공항에서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므로 이 부분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향후 한예슬이 또다시 드라마 제작 현장의 열악함을 역설하기 위해서도 이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에 한예슬이 '한예슬 사건의 전모'라는 제목의 성명서 전문에 나와 있는 내용의 태도를 여전히 견지하면서 드라마 제작 현장의 열악함을 역설한다거나 마치 배우들의 총대를 맨 희생양이라도 되는듯이 이용하려 한다면 시청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