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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막장 드라마, 다 디져쓰~~~"

우연히 TV 편성표를 보다가 '포도밭 그 사나이'를 재방송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수요일 낮에 2회 연속으로 재방송하는 모양이다. '포도밭 그 사나이' 이 드라마, 못 보신 분들에게 꼭 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참 괜찮은 드라마다. 이미 보신 분들이라도 다시 본다면 감회가 새롭지는 않을까 한다. 막장 드라마에 지쳐 있는 분들이나 막장 드라마를 선호하는 사람이 본다면 그 평가는 어떨까? 살짝 궁금해지긴 한다.

포도밭 그 사나이

굉장히 섬세한 드라마다. 이순재의 명품 연기에 '이 사람이 정말 가수인가'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김창완에서부터 마을 사람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장인물들이 드라마속에 섬세하게 스며들어 있고 이를 잘 담아냈다. 이지현으로 연기하는 윤은혜의 경우는 초반엔 드라마와 따로 논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어느 정도 지나면서 윤은혜도 이지현이란 배역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후반부엔 윤은혜가 아닌 이지현이 되어 있다. 내가 참 괜찮다고 생각하는 몇 안되는 드라마중의 하나다.

방영 당시 '주몽'이란 드라마와 시청률 경쟁을 했던 탓에 부진한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입소문으로 알려지면서 고정 시청자층을 확보한 드라마이기도 했다.

드라마의 줄거리는 뻔하다. 도시 처녀가 포도밭 농사를 1년 짓고 그 포도밭을 팔아서 사업 밑천으로 쓰겠다는 환상을 가지고 시골에 내려 간다. 그런데 거기엔 우직한 시골 총각이 있고 둘은 티격태격 사랑을 키워 나가고 포도밭을 팔기보다는 시골에 눌러 앉아 시골 아낙네가 된다는 줄거리. 그런데 드라마의 진행은 그다지 뻔하지 않다. 막장 드라마는 상황을 이리 저리 꼬아 놓기는 하지만 드라마의 진행은 결국 뻔한 내용으로 흐르게 마련인데 이 드라마는 뻔한 스토리이지만 드라마는 맛깔나게 진행된다.

포도밭 농사를 지으러 내려가면서 '탱자탱자' 놀면서 일꾼들 부려먹기만 하면 된다는 환상을 꿈꾸는 이지현, 물 그릇에 묻은 고춧가루를 보면서 환상에서 '홀딱' 깬다. '아이 드러워.' 내세울거라곤 힘자랑밖에 없는 시골 처녀 홍이, 같은 도시처녀지만 이지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세련되고 우아해서 이지현을 늘 주눅들게 만드는 수진, 이지현의 의상 디자인을 훔쳐간 실장, 이들이 있기에 시청자들은 이지현을 더 사랑하게 된다.

이지현의 의상 디자인을 훔쳐간 실장을 물에 빠뜨리고 택기와 지현이 의기투합한다든가, 반딧불이의 환상을 현실에서 겪게 되는 지현, 꾀병을 부리다가 옆에서 삼겹살을 굽던 마을 사람들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삼겹살 한 점을 손에 넣었지만 강아지가 홀랑 물어가버린다든가, 이 드라마의 곳곳에는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든가 상상해봤을만한 에피소드가 숨어서 드라마의 양념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이 드라마를 감상하는 포인트는 매회 끝나는 부분에 있다. 장택기와 이지현이 번갈아가면서 툭툭 던지는 대사 한마디. 뭐 대단한건 아니고 '포도밭 그 사나이, 재밌네.' 같은 그런 말들인데 이게 드라마를 더 맛깔나게 해준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음악 또한 역시나 일품이다. '매일 보는 얼굴 똑같은 표정 처음 그날 처럼 그대로인데 별일도 아닌 이유로 다투다가도 투덜대는 네 모습에 웃음이 나와' 뭐 이런 잔잔한 가사에 잔잔한 곡조를 붙였고 잔잔하게 진행되는 드라마에 삽입된 곡이다. 이 세 가지 잔잔함이 보는 이의 맘을 절절하게 하고 아리게 한다.

이 드라마에도 억지스런 설정들은 등장하지만 그런대로 웃어넘길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은 시골 총각 장택기가 박사 학위가 있는 연구원 출신이란 설정이다. 한국에 뿌리 깊게 박힌 학벌 사상을 이 드라마는 떨쳐내지 못했다. 장택기가 그냥 시골 총각이고 농삿일을 하면서 연구하고 공부하는 건실한 청년으로 그려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런 과정에서 수진을 만났고 수진도 택기가 맘에 있지만 그가 시골 총각이라는데에서 확실한 맘을 정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는 정도의 설정. 이랬다면 이 드라마는 어떤 반응을 얻었을까?

이런 작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포도밭 그 사나이'란 드라마는 소위 막장 드라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드라마다. 사실 시청률이 3~40 프로가 넘어간다면 막장 드라마라는 논란 자체가 무의미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거 안 보면 되지'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또 안 볼 수가 없는게 막장 드라마 아니던가. 난 TV 시청 시간대나 성향이 달라서인지 몰라도 최근에 막장 드라마라고 많은 비판을 받았던 '아내의 유혹'은 정말 단 한 번도 시청하지 않았다. 그냥 남들이 막장 막장하니까 그런가보다 했을 뿐.

내가 시청했던 드라마중에 가장 막장이라고 생각했던 드라마는 '너는 내 운명'이다. 이 드라마는 처음엔 시청하지 않았다가 어느 정도 지난 후부터 시청하게 되었는데 드라마 진행 내용이 그야말로 '내 손바닥 안'이었다. 상황을 이리 저리 억지부리면서 꼬아 놓아봤자 어차피 진행은 뻔한데, '시청률이 뭐길래 드라마 작가란 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팔아치울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포도밭 그 사나이'를 쓰면서 장택기의 입을 빌려 한마디 하고 싶다.

"막장 드라마, 다 디져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