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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글전용이 좌파의 토양을 만든다

   
   
   
유명한 한 보수 논객은 다음과 같은 요지를 이유로 한글전용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글 전용을 저지하여야 선진화가 이뤄진다. 좌파득세와 한글전용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두 가지 장애물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닢처럼 연관되어 있다. 좌파가 한글전용을 확산시키고, 한글전용이 좌파가 득세할 수 있는 천박한 문화적 풍토를 만들었다."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 예를 든 것이 바로 이전 글(부구리는 일제가 만든 겁니다)에서 언급한 부구리이다. 부구리의 경우는 보수 논객의 추정에만 입각해서 쓴 잘못된 내용이기는 하나 지명에 한자를 병기해야 필요성은 있다. 대개의 지명들은 한자의 훈(訓)을 빌려 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전용 정책이 옳지 않다고 보지만 '한글전용이 좌파의 토양을 만든다'는 논거를 들어 한글전용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넌센스다. 그러나 이 보수 논객의 분석에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 있다. "한글전용은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천박하게 만들어 잘 속는 사람들로 전락시키고 있다. 난장판 문화의 원인이 한글이다. 정치적 선동에 잘 속는 국민, 저질문화로는 일류국가를 만들 수 없다."

요 며칠 새 블로그에서 절감한 것은 요즘 학생들의 이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원인이 오로지 한글전용에만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단어의 의미를 전혀 상반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본다면 한글전용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전혀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으로 보인다. 크게 또는 잘게 보아야 할 정도의 판단력은 부족하더라도 기본 단어의 의미조차도 모를 정도라면 문제가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누군가의 얼토당토않은 얘기에 속아 그 쪽으로만 터무니없는 확대재생산을 반복해 내며 스스로를 바보라고 광고하는 천박한 짓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한글전용 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한글전용이 한글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글의 질서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데에 있다. 얼마 전에 휴일날 오전에 방송되는 한 TV 퀴즈 프로그램을 보던 중에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와 답이 나왔었다. '띠동갑'과 '어깨동갑'에 대한 문제였었는데 이 퀴즈 프로그램에서는 '띠동갑'이 '주로 12살 차이가 나는 띠가 같은 사람'이 정답이라고 나왔다.



하나 이것은 '동갑'이란 한글의 질서가 무너져 버린 대표적인 예다. 동갑(同甲)이란 '육십갑자가 같다'는 뜻으로 나이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갑보다 예순한 살 많은 경우에도 육십갑자가 같지만 동갑이라는 말과 구분하기 위해 회갑(回甲)이나 환갑(還甲) 등의 말을 사용한다. 띠동갑이란 '띠 하나 차이, 즉 한 살 차이가 나는 동갑'을 뜻하는 말로 자치동갑이라고도 한다. 자치동갑이란 '차이가 얼마 안 된다'는 의미의 '자치'가 붙여진 말이다.

퀴즈프로그램에서 정답으로 처리할 정도면 이미 국어학자들이나 국립 국어연구원 등 유관기관에서도 이를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TV에 출연하는 연예인은 물론 아나운서들까지 띠동갑을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띠동갑의 의미 자체가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띠동갑과 어깨동갑으로 구분해 버림으로써 '자치'라는 한글도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의미가 바뀌는 경우는 많지만 최근에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는 단어는 바로 '재원'이다. 요즘은 언론이고 방송이고 모두 유수 명문대를 졸업한 우수한 젊은이들을 소개하면서 남녀 구분하지 않고 재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사용한다. 그러나 재원은 재주가 뛰어난 젊은 여자에게 붙이는 수식어이고 재주가 뛰어난 남자에게는 재사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 점점 재원이란 말이 남녀 구분하지 않는 의미로 확대되고 있는데 재원의 원(媛)을 보면 계집 녀자가 들어가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뜻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재원이란 말이 남녀 구분되지 않는 의미로 확대되는 것은 넌센스다.

이렇게 하나 둘씩 한글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자꾸 한글의 원래 의미를 바꿀 게 아니라 TV에 출연해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영향력이 큰 연예인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서라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TV의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잘못된 언어의 사용은 대개 연예인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는 연예인들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틀리다'와 '다르다'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러다 보니 '틀리다'를 '다르다'로 '다르다'를 '틀리다'로 잘못 이해하고서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학생들이 날로 늘어난다.

한국어는 이미 한자를 모르고서는 뜻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한글전용은 어려운 상태다. 다만 신조어만이라도 한글로 만들고 잊혀진 한국 고유의 말을 찾아내 활성화시키는 쪽으로 한글전용 정책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종이 박스를 보다가 "횡적엄금"이라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웃었던 적이 있다. 한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짐작할텐데 횡적엄금(橫積嚴禁)이란 '절대 가로로 쌓지 말라' 즉 박스 안에 내용물이 다칠 수도 있으니 옆으로 쌓지 말라는 뜻으로 써 놓았던 것이다. 이처럼 한자의 훈을 빌어와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것을 반복하면서 한자를 병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한국의 지명 중에서도 애초에 한자로 지어진 곳도 있지만 한국 고유의 말을 애써 한자로 바꾸어 놓은 곳이 많다. 조갑제씨가 부구리를 예로 들었으니 부구리 근방에서 찾아보자면 부구리에서 덕구온천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석수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그런데 "석수리(石水里)의 유래는 이 마을에 홍수가 나면 사람들이 비릿길(벼랑길)로 통행하게 되어 돌수비리(돌시비리)라 불렀던 곳인데 이 돌시비리를 한자어로 바꾸어 석수리(石水里)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서울에서 찾아 보자면 대표적으로 여의도를 들 수 있다. 국회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의 닉네임이 '너서미'인데 이것이 바로 여의도와 관련 있는 말이다. 여의도는 예로부터 한강 가운데에 '너른 벌이 있는 섬'이란 뜻에서 '너벌섬'으로 불렸으며 더 줄여 '너섬'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 너섬을 한자를 이용해 억지로 꿰어 맞춘 것이 바로 여의도인 것이다. 국회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너서미'란 닉네임을 사용해 여의도의 옛 이름을 더 알릴 수 있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이처럼 지명 뿐만 아니라 한국어에 한자를 병기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한글을 전용해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잊혀져 버린 한국 고유의 말을 찾아내 되살려 놓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한국 고유의 말이 풍부해져 간다면 애써 한자의 훈을 빌어와 신조어를 만들고 또 다시 한자병기를 주장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글을 창제했을 때 최만리를 비롯한 유생들이 한글 반대 상소문을 올렸던 것은 그 당시에는 그게 대의이고 명분이었기에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조갑제씨가 한글전용정책이 좌파의 토양이라는 요지로 한글전용 폐기와 한자병기를 주장하는 것은 타당성도 없고 설득력도 없다. 어쨌든 한글전용이 옳지 않은 정책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모든 것을 좌파와 연관짓는 것은 넌센스다. 그가 말하는 좌파라는 의미 자체부터가 애매모호하고 좌파를 들먹이는 의도도 순수하지 않다.

하여튼 한글을 살리는 길이 어떤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인 것 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학생들의 이해력은 정말이지 그들 말로 '안습'인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