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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브래지어, 찜질방, 고래밥, 호떡... "웃긴데이"

   
   
   
오래 된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2008년도 탁상 달력을 발견했다. 2007년도 말에 지하철 입구에서 모 결혼정보회사에서 나누어 주던 달력인데 당시 탁상달력이 필요했던 터라 받았었던 것 같다. 왜 이 달력을 버리지 않고 남겨 두었을까 궁금해서 들춰 보았는데 별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고 달력의 운이 좋았던 것인지 우연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달력을 들춰 보다가 좀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월 14일마다 기재되어 있는 무슨 무슨 데이였는데 친절하게 설명까지 첨부되어 있다.

1월 14일 ; 캔들 DAY ⇒ 양초로 분위기를 만들어 고백하는 날
2월 14일 ; 발렌타인 DAY ⇒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
3월 14일 ; 화이트 DAY ⇒ 남성이 좋아하는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
4월 14일 ; 블랙 DAY ⇒ 연인없는 남녀가 만나 외로움을 달래는 날
5월 14일 ; 로즈 DAY ⇒ 연인들이 장미꽃 사이를 거닐며 데이트하는 날
6월 14일 ; 키스 DAY ⇒ 사랑하는 연인들이 키스하는 날
7월 14일 ; 실버 DAY ⇒ 연인들이 실버(은제품)을 주고 받는 날
8월 14일 ; 그린 DAY ⇒ 연인들이 삼림욕하며 시원한 휴가를 즐기는 날
9월 14일 ; 뮤직 DAY ⇒ 연인들이 함께 음악을 공유하는 날
10월 14일 ; 와인 DAY ⇒ 연인과 분위기 있는 곳에서 와인 마시는 날
11월 14일 ; 무비 DAY ⇒ 연인들이 함께 영화 보는 날
12월 14일 ; 허그 DAY ⇒ 연인들끼리 포옹으로 추운 겨울을 함께 녹이는 날

일명 포틴데이라고도 부르는 기념일인데 1월 14일을 다이어리데이, 5월 14일을 옐로우데이와 피앙세데이, 9월 14일을 포토데이, 10월 14일을 레드데이, 11월 14일을 오렌지데이, 12월 14일을 머니데이로 부르기도 한다. 최초의 발렌타인데이를 본따 만들기 시작하면서 매월 14일이 모두 기념일로 정착되었는데 기업들이 이러한 기념일을 대상으로 데이마케팅(Day Marketing)을 시작하면서 무슨 무슨 데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이젠 이러한 데이가 하도 많아 무슨 데이가 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대한민국은 가히 DAY 공화국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이러한 데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장사꾼들이 얄팍한 상술로 억지춘향으로 만들어낸 데이에 역으로 소비자가 장사꾼에 종속되어 버리는 기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심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매년 2월14일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카드를 교환하던 것에서 비롯된 발렌타인데이를 일본 장사꾼들이 초콜릿을 주고받는 날도 둔갑시키는데 성공하자 3월 14일은 사탕을 주고받는 날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소비자들은 무언가 쓸데없는 데 돈을 써야 되고 장사꾼들은 가만히 앉아서 돈을 챙길 수 있는 날이 만들어졌다. 그러다보니 매월 14일만으로는 부족해 적당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날을 찾아 무슨 무슨 데이가 알 수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데이를 보면 '웃긴데이'들도 꽤 많고 무언가 억지로라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날짜를 찾아내느라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을까 하는 안쓰러운 생각이 드는 데이도 있다. 1월 19일은 숫자 '119'를 연상시켜 '핫데이'라 해서 연인들끼리 함께 찜질방을 가는 날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 날은 한 유통업체가 추위가 심해지고 불황의 영향으로 호떡 매출이 '호떡집에 불나듯' 급증하자 '119 호떡 데이'로 명명하고 호떡 상품 할인 판매에 나섰다.

11월 8일은 '브래지어데이'라는데 한 란제리 회사가 브래지어 끈 모양의 11과 가슴 모양의 8을 본떠 이날을 브래지어데이로 정했단다. 한편 한 제과업체에서 12월 12일은 '고래밥데이'라고 명명하며 데이마케팅을 펼쳤다. 12월 12일이 '고래밥 데이'인 이유는 12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이 고래와 닮았기 때문이란다. 이 업체가 고래밥데이를 들고 나온 이유는 경쟁업체들의 에이스데이와 빼빼로데이가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12를 옆으로 뉘어 고래의 모양과 같다고 비유하는 발상도 그렇지만 그러한 12란 숫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을까 생각하면 참 안쓰럽다.

어제인 11일은 빼빼로데이였고 언제부턴가 가래떡데이로도 불리고 있다. 가래떡데이의 경우는 쌀 소비를 촉진하자는 의미가 더해지지만 빼빼로데이든 가래떡데이든 어차피 다 상술이 만들어낸 날이다. 11월 11일은 힘차게 일어서자는 뜻으로 직립을 의미하는 11에서 착안해 지정한 "지체장애인의 날"과 11의 한자인 十一을 합치면 흙 토(土)가 된다는 데서 착안해 지정한 "농업인의 날" 그리고 '1'이라는 숫자가 '일하다'의 '일'과 같은 발음이고 '1'이 가장 많은 날이라 '일이 많으니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의미를 부여해 지정했다는 "고용의 날"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없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