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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조갑제씨, '부구리'는 일제가 만든 겁니다

   
   
   
조갑제닷컴에서 조갑제씨의 글을 몇 개 샘플링해서 읽어 보다가 참으로 황당한 글을 읽었다. '부구리'에 대해 언급한 글이었는데 글의 내용이 꽤나 어이가 없었기에 문득 호기심이 생겨서 해당 사이트에서 '부구리'를 검색해 보았다. 이 사이트의 검색 품질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검색된 글은 총 다섯개였는데 이 다섯개의 글 모두에는 최초의 글과 토씨가 거의 다르지 않은 동일한 내용이 들어 있는 글들이었다.

조갑제씨가 다섯개의 글에서 인용한 글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시국강연회를 하러 경북 울진에 갔었는데 이 때 '부구리'라는 도로표지판이 보였다. 뜻을 몰라 현지인 몇 분에게 물어 봐도 아는 사람이 없어 서울로 돌아 와 인터넷을 검색하여 보니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사이트에 '富邱里'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 한자를 해석해 보니 '부자 동네'라는 뜻이고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 서면서 부자 동네가 되었으니 선조들이 지은 지명인 부구리는 그 지명대로 선조들의 염원이 희망대로 실현된 경우이다.

그런데 조갑제씨가 쓴 위 글의 내용은 틀렸다. 조갑제씨가 富邱里라는 한자만 보고는 "유레카"를 외쳤는지 모르지만 글의 내용은 모두 富邱里라는 한자에 기인한 조갑제씨의 추측에 의한 것일 뿐이다. 신출내기 기자가 이런 추측성 기사를 쓴다면 혼쭐을 내줘야 할 대기자가 스스로 이런 추측성 글을 쓰는 것도 모자라 '국민교재'로 삼겠다고 하는 것은 좀 웃기는 일이다.



부구리(富邱里)는 우리 선조가 만든 지명이 아니라 일제 때 만들어진 지명이다. 그러니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몇 개의 마을을 합쳐서 만든 지명인데 흥부동(興富洞)의 부(富)와 염구동(鹽邱洞)의 구(邱)를 합해서 부구리(富邱里)라고 하였다.

흥부동(興富洞)이란 지명이 탄생한 것은 1585년 경이었다. 당시 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을 개척한 5성씨(五姓氏)의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니 농토가 비옥하고 산세를 보아 부자 마을이 될 것 같아 흥부(興富)라 하였다고 한다. 흥부동만 놓고 보면 우리 선조가 만든 지명이고 일제의 잔재는 없다.

그런데 염구동(鹽邱洞)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이 마을은 원래 영구리(靈龜里)라고 했던 곳인데 1679년 경에 이 마을을 개척한 삼성(三姓)이 마을 안에 거북과 같은 바위가 있으므로 신령님이 내린 바위라 하여 마을 이름을 영구리(靈龜里)라 하였다. 이러한 영구리를 염구리로 둔갑시킨 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일본인이었다. 1914년에 토지세부측량을 하던 일본인 측량기사가 영구(靈龜)라 기재하려다가 표기하기에 불편하다 는 이유로 염전리(鹽田里)의 염(鹽)자와 구(龜)를 쓰기 쉬운 구(邱)자로 표기하여 염구리(鹽邱里)로 바뀌어 버렸다. 일본인에 의해 최초와는 다른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 행정구역 개편 때 흥부(興富)의 부(富)자와 염구(鹽邱)의 구(邱)자를 합하여 부구(富邱)로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부구리(富邱里)는 우리 선조가 만든 지명이라고 볼 수가 없으며 일본이 일방적으로 만든 지명인 것이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합쳐졌으니 부구리라 부를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인이 표기에 불편하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변경해 버린 구(邱)자는 일제가 남긴 잔재로서 원래의 구(龜)자로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다.

비극이 된 대수동(大藪洞), 비극을 예고하는 마분동(馬墳洞)

조갑제씨가 말하는 지명의 예언력이라는 것도 '꿈보다 해몽'인 추측일 뿐이다. 가령 비행장이 들어설 것을 예언한 듯한 지명이라고 언급한 비상리(飛上里)의 경우도 그렇다. 이 지역은 조선 영조시대부터 당시 유명한 풍수지리가에 의하여 인근에 있는 문필봉, 삼두봉 등의 산의 형세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닮았다고 하여 기러기 모양의 큰새가 날게 된다는 예언이 나돌았는데 이 때 그 지명(地名)을 기러기가 나는 동네라 하여 '비홍리(飛鴻里)'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 때에 비홍리를 상중하로 삼분해서 비상리(飛上里), 비중리(飛中里), 비하리(飛下里)로 만들었던 것이다.

부구리 근방에 우연히 지명과 일치하는 곳들이 있기는 있다. 가령 만호곡(萬戶谷)처럼 지명대로 원자력 발전소의 직원 숙소가 건설되면서 많은 사람이 기거하고 있고 대수동(大藪洞)처럼 지명대로 원자력 발전소의 공업용수 공급을 위한 댐이 건설되면서 마을이 수몰되었다. 하지만 만호곡은 만호(萬戶)가 들어섰던 계곡이었고 대수동은 큰 숲을 쳐내고 이 마을을 개척하여 대수리(大藪里)라 했던 곳이다.



대수동의 경우는 수(藪)자를 숲이 아니라 늪의 의미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옛날부터 물이 많이 흘러내렸던 곳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공업용수를 끌어가기 위해 이 곳에 댐을 만들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결국 부구리에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섰던 이유도 자본이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자본의 논리에 의해 대수동은 수몰되고 원주민들은 집단 이주하는 비극을 겪게 된 것이다.

대수동 마을은 이렇게 물 속에 잠겨 버리고 인간의 탐욕에 의해 버려졌다. 그런데도 자연은 인간을 버리지 않고 인간의 발걸음을 허락하고자 했는지 대수호(大藪湖)가 끝나는 곳에 황금소나무가 발견되어 인간들의 발길을 잡아 끌고 있다.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업다"고 했던가. 대수호가 되어 버린 대수동의 끝자락에 이르면 이 시조가 절로 읊어진다.



조갑제씨는 부구리가 부자 마을이 되었다고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외지인들이 들어와 부자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고 원주민들은 거의 이주해 버렸거나 연로한 분들이 남아 지키고 있는 상태다. 단순히 원자력 발전소만 보고 감탄하며 그 이면에 숨겨진 아픔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아예 외면해 버리는 조갑제씨가 스스로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짧은 소견을 읽고 나니 참 갑갑해진다. 조갑제씨의 글 첫 문장에 나오는 "가장 무서운 무식은 자신이 무식하다는 걸 모르는 無識이다"라는 말은 누가 더 절실하게 알아야 할 말일지 의문이라도 가져봤으면 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확장되는 곳에 마분동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 곳은 임진왜란 중 울진 출신의 의병장 김언륜이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마분동이란 지명은 이 전투에서 사람과 말이 수없이 죽어 쌓였다 하여 붙여진 것이고 이 전투를 마분동 전투라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반대로 김언륜의 행적마저 거의 기록할 수 없었고 당시 도로를 개설하면서 마분동에 있었던 김언륜의 묘소마저 이장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본래 묘소 모퉁이에 비밀리에 이장하여 어린아이 무덤처럼 만들어서 지켜 왔다. 이 때 '김공언륜지묘'가 새겨진 묘지석과 투구, 긴 칼이 발견되었는데 일본인이 빼앗아 갔다. 조갑제씨의 논리대로 보자면 마분동은 엄청난 비극을 예고하는 지명인 셈이다.

울진은 조갑제씨의 강연이 불필요한 충절의 고장

조갑제씨가 최초로 글을 쓴 때는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였고 그 당시에 지방으로 강연을 다녔던 모양인데 울진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장으로서 조갑제씨 같은 위인들이 강연 다닐 만한 곳도 아니고 강연이 불필요한 곳이다. 조갑제씨가 '부구리'라는 도로표지판을 본 곳은 아마도 부구 삼거리 쯤이라 추정되는데 그 위치에서 지척지간에 흥부장터 기미만세 기념탑이 있다. 울진 매화장터에서 시작된 기미만세 운동이 흥부장터로까지 번졌고 부구리에서는 매년 4월 13일이면 기념행사를 한다.



기미년 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흥부장터에 모였던 인원은 대략 천여명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천여명이라면 어마어마한 숫자에 달한다. 거기서 조금 남쪽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 싸웠던 마분동이 나오고 더 내려가면 울진 지역의 기미만세 진원지였던 매화장터가 나오고 조금 더 내려가면 평민출신 항일 의병장으로 '태백산의 호랑이'라고 불리며 일제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신돌석(申乭石) 장군의 유적지가 나온다. 이처럼 울진은 예로부터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기꺼이 맞서 싸웠던 충절의 고장으로서 조갑제씨 같은 위인의 강연 따위는 불필요해 보이는 곳이다.

조갑제씨가 이 곳에 가서 강연을 하고 어설픈 추정에 입각해서 쓴 글을 반복해서 인용하면서 '국민교재'로까지 삼겠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다. 조갑제씨가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며 '국민교재'라는 것을 쓰려 한다면 불필요한 곳에 강연을 다니는 것보다 일제 때 일본인이 빼앗아 간 김언륜의 묘에서 발견된 '김공언륜지묘'가 새겨진 묘지석, 투구, 긴 칼을 되찾아 오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