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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동이' 시청률 노예 된 이병훈 사극

   
   
   
MBC 창사 49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동이'가 드디어 종영한 모양이다. MBC가 드라마 '대장금'으로 이득을 보았다는 경험칙에서인지 몰라도 '이산'과 '선덕여왕' 그리고 '동이'에 이르기까지 시청률을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 따위는 언제 어떤 식으로 무시해도 그만이라는 식의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 MBC가 이 일련의 드라마들처럼 시청률 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사실은 무시해도 그만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여타의 드라마들까지도 몰락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MBC는 드라마 '동이'가 종영한 이 시점에 그 알량한 시청률에 자축하고 있을 게 아니라 상기한 일련의 드라마들을 거치면서 쌓여가는 시청자들의 피로도를 파악하는게 좋을 것 같다.

드라마 '동이'가 첫방송을 시작했을 때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장희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었고 그거 하나만으로도 여타의 만족스럽지 못한 내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시청할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장희빈은 별다른 계기나 설명도 없이 투기에나 눈이 먼 그저 그런 여인네로 전락해 있었다. 초반부의 합리적인 인품과 출중한 능력을 겸비한 대단한 기개를 가진 여장부는 느닷없이 어디론가 실종되어 버렸고 이도저도 아닌 졸렬한 여인네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나는 미련없이 채널을 돌려버렸다. 타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중에 마땅히 볼 만한 드라마가 없다고 생각했던 때였지만 드라마 '동이'를 계속 시청해야 할 만한 가치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드라마 '동이'의 초반부가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기보다는 이병훈 PD의 이전 작들과 마찬가지로 시청률을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은 마음대로 왜곡해도 그만이라는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단정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숙종과 장희빈 그리고 인현왕후의 이야기는 워낙 드라마틱한 사건이었으므로 다양한 형태로 창작되어져 왔었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숙빈 최씨는 조연에 머물렀는데 이병훈 PD는 이 극적인 사건을 다루면서 숙빈 최씨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했고 이러한 발상은 참신했다고 평가할만하다. 그러나 '동이'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 '동이'를 전지전능한 신의 경지로 만들기 위해 드라마틱한 사건의 주인공들인 숙종과 장희빈 그리고 인현왕후를 비롯한 주변인물 모두를 조연으로 둔갑시키는 드라마 '동이'는 한마디로 상상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결국 이병훈 PD가 숙빈 최씨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숙빈 최씨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므로 역사왜곡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는 이유로 선택했던 것이었지 참신한 발상이나 새로운 해석의 시도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역사에 단 한 줄의 기록만이 남아 있더라도 그 행간을 읽어내지 못하고 역사의 기록이 부족하더라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모르든가 무시하는 것이 이병훈 PD의 역사나 시대에 대한 인식 수준이고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병훈 PD는 아마도 역사적인 기록이 부족한 소재만을 찾아내기 위해 애쓸 것이고 이런 수준의 드라마 제작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내가 드라마 '동이'의 시청을 멈추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또 다른 계기는 그 즈음에 이병훈 PD의 한 인터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시청자들에게 권하는 관전 포인트'를 말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병훈 P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 드라마가 역사에 근간을 하지만 픽션을 많이 창작하기 때문에 80% 이상이 작가와 제작진이 만드는 창작물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역사적 사실과 드라마 내용을 합쳐서 보실 필요는 없지 않겠나. 큰 틀만 보시고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시면 재밌을 것 같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PD가 그것도 사극의 거장이라 불리는 PD의 인식 수준이 이 정도라면 더 나은 내용의 드라마를 기대하기는 난망한 일일 것이다. 드라마의 80% 이상이 허구라면 사극이라는 타이틀을 달지 말아야 되고,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추정할만한 내용을 삽입하지 말아야 되고,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들의 이름을 차용하지 말아야 한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사건까지도 명확히 밝히고 실존인물들을 모두 등장시켜 놓고서는 80% 이상이 허구이니 역사적 사실은 무시하고 드라마는 드라마로만 보라는 건 해괴한 궤변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다보니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댓글이 종종 달리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런 댓글을 쓰는 사람들의 댓글 수준을 보면 그 사람들이 드라마와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다른지를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인지 회의감이 든다. 한 번은 제작진들이 '무신경하다'고 했더니 어떻게 무신경하다는 말을 쓸 수가 있느냐는 악플이 달렸길래 무신경하다는 말의 용례를 본문에 덧붙여 놓았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고작 이 정도 수준의 사람들이 정말 역사적 사실과 드라마 내용의 차이를 알고 드라마를 시청할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과 드라마 내용의 차이를 알고 보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터무니없는 댓글을 달고 다니는 바보같은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대체 그들이 그런 댓글을 달고 다니는 이유와 불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실시간으로 수천만명이 시청하는 드라마에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방송하는 것은 괜찮고 거기에 대해서 실제와 다른 내용이었다고 써보는 글들은 불만이라니, 그것도 하루 종일을 걸려도 많아야 몇천명이 조회하는 글들을 쫓아다니며 아예 쓰지도 말라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그들의 태도는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그런데 이젠 드라마를 제작하는 PD가 그것도 사극의 거장이라 불리는 PD가 친히 나서서 80% 이상이 창작물이니 드라마는 드라마로만 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면 도대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난감한 일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이건 마치 '안 보면 그만'이라는 악플러의 악플이 연상될 정도였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PD는 물론 작가를 비롯한 모든 제작진들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정당화하려고 애쓸 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단지 드라마의 시청률을 위해서 마음대로 바꾸어도 그만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그 사실을 수치스러워해야 정상이다.

이병훈 PD는 2008년도에 끝난 드라마 '이산' 종방연에서 "드라마 재미를 추구하다보니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은 정순왕후의 쿠데타 등이 담겼다. 극적인 구성을 하다보니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고 털어놨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다음부턴 고증을 무시하는 행위를 안하면서도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도 했었다.

이랬던 이병훈 PD가 그로부터 고작 2년이 지난 시점에 와서는 '80% 이상이 창작물이니 드라마는 드라마로만 보라'는 입장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병훈 PD가 지금 이 시점에서 정말로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시청률을 위해서 역사적 사실을 바꾸었다는 것이 아니라 시청률을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바꾸어도 무방하고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이병훈 PD 본인이 이미 시청률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부터 시청률을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는 소재를 찾아내려고 역사서를 뒤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시청률을 위해서 정사(正史)를 왜곡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 것이라면 차라리 제작하지 않는게 낫다. 이미 이런 식의 이병훈표 사극에 피로도를 느낀 사람들을 만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니까 말이다. 유사한 내용의 사극 제작을 계속 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사극의 형식을 빌린 영웅담이나 에로물을 제작하는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이병훈표 사극은 이미 몰락해가고 있고 시청률을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은 왜곡하도 그만이라는 모든 사극은 몰락해야 한다.


덧) 이 글은 '동이'의 시청을 그만두던 시점에 정리해보던 글이었다. 그러나 출연배우의 폭행사건이란 악재가 생기는 바람에 글을 쓰는 일자를 미루게 되었는데 동시간대 타 방송사 드라마 포스팅을 자주 올리고 있던 시점이었기에 의도하지 않은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동이'가 종영할 때까지 미루어두었던 것이다. 문득 '동이'가 종영되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기에 정리했던 생각을 끄집어내 등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