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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제빵왕 김탁구' 여불위의 일자천금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29부와 30부 즉 결말 부분은 주로 이 드라마의 기획 의도에 충실한 전개였던 것 같다. "이 세상은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감사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하나를 가져도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수 없이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감사한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드라마에 등장했던 등장인물들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기획 의도대로 결말지어졌다. 김탁구와 구마준은 이사회에서 거성의 대표 자리에 어울리는 적임자는 구자경이라고 이사들을 설득한 후 구자경에게 거성의 대표 자리를 내주고 떠났다. 그리고 그 둘은 이제 평생의 동무로 지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김탁구는 팔봉제빵집으로 돌아가 양미순과 혼인을 해서 어머니인 김미순을 봉양하며 살아가고, 구마준은 앞으로 뭘 할 수 있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 찾아보겠다며 유경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




구일중은 거성에서 손을 떼고 개인제빵실에서 자식들을 응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한승재의 손에 쥐어진 것은 거성이 아니라 수갑이었고 서인숙에게 남은 것은 껍데기 뿐인 텅 빈 거성가의 안주인 자리였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승재가 감옥으로 간 것은 거성의 자금을 횡령해 왔던 이중장부 때문이었지 과거에 저질러왔던 악행에 대한 형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이 곁을 떠나버렸다는 것이 죄값이라면 죄값이겠다.

구자경은 거성의 대표를 맡아 열정적으로 직무를 수행해내고 있고 구자림은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면서 새로운 출발을 했다. 김미순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던 닥터윤은 예전처럼 병원을 개원해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고 미스장과 공주댁은 김미순의 집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신유경의 아비 신씨는 개과천선해서 경비에서 진급해 제품 출하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진구는 지병에서 완쾌한 여동생을 팔봉제빵집으로 데리고 와 팔봉집 식구들에게 소개시킨다. 이 드라마에서 진정한 해피엔딩을 맞이한 사람은 조진구가 아닐까 생각되고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드는 장면이었다. 지난 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싶게 어김없이 새 날은 시작되고 50여일 만에 영업을 재개한 팔봉제빵집은 예전처럼 팔봉빵집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빵을 시작한다. 김탁구가 거성의 대표로 있을 때 비서였던 차비서가 김탁구를 따라 제빵의 길을 가겠다며 새로 합류했을 뿐 팔봉제빵집 식구들은 언제나처럼 활기차게 새로운 날을 시작하고 있다.

드라마를 통해서 행복과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드라마적인 상황과 현실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는 전체적으로 도교적 성향이 짙게 풍기고 결말 또한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자칫 니힐리즘(nihilism)이나 현실도피(現實逃避)와 같은 소극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까하는 우려도 든다.




드라마의 결말은 대체적으로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는데 이것은 자칫하면 제 분수를 알고 만족하는게 가장 편안한 길이라는 패배감이나 현실도피로 연결될 위험성이 있다. 팔봉의 '어차피 인생은 겪는 것'이라는 말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겪어 낸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지 아직 겪어 온 세월보다 겪어야 할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이 좌표로 삼기엔 부적절할 수도 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든가 전에 어떤 코미디언이 말한 '롤러코스터論'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보면 되겠다.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되 여의치 않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팔봉의 '인생은 어차피 겪는 것'이란 말의 숨은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생각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인격이 된다. 인격을 조심하라, 그것이 너의 운명이 되리라." 탈무드에 나오는 이 구절이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결말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에 대한 언론의 반응을 보다가 보니 문득 여불위의 일자천금(一字千金)이 떠오른다. 여불위는 논객들을 불러 들여서 그들로 하여금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저술하게 한 뒤 이 책을 수도 함양의 성문 앞에 진열하고 "이 책에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덜 수 있는 자에게는 내가 천금을 주겠다(有能增損一字者予千金 ; 유능증손일자자여천금)"고 한 데서 나온 말이 일자천금이다. 일종의 자기과시를 목적으로 쓰였던 말인데 오늘날에는 단지 '아주 훌륭한 글'이라는 뜻으로만 쓰인다. 언론이라는 게 오로지 영리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닐텐데 이 드라마에서 더하거나 덜 만한 것을 찾아내려하기보다는 단순히 '아주 훌륭한 드라마'라는데 편승하는 것으로 보여 상당히 거슬리기에 말이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승재가 여불위와 닮은 점이 있다. 여불위는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진나라의 자초(子楚)를 만나 자초가 진나라로 귀국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이 때 여불위는 자기의 아이를 임신한 애첩을,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자초에게 주었다. 그 후 자초는 장양왕이 되었으나 3년만에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진시황이 된다. '사기(史記)'에는 진시황이 바로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불위는 진시황의 모후가 된 자신의 애첩과 몰래 정을 통하게 되는데 그와 연관된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결국은 자살을 하고 만다. 왠지 묘하게 한승재에게서 여불위가 오버랩된다.


                   


본문에 삽입된 이미지들은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결말을 정리해 본 것이다. 글로 표현하기보다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대신하는 게 나은 방법일 것 같기 때문인데 상기한 짧은 결말을 이미지에 대입해서 보면 되겠다. 바로 위의 이미지는 29부 방송분에서 나왔던 옥에 티를 캡쳐해 놓은 것이다. 김탁구는 미출사태와 관련된 사장단들을 모아놓고 새로 개발한 우리쌀빵을 먹어 보라고 권유하는데 먹으려고 집어 든 빵엔 벌써 한 입 베어 문 자국이 선명하다. NG가 몇 번 났었던 모양인데 정작 최종편집이 NG가 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