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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시사현장 정치

내가 '줄투표(straight-ticket voting)'를 했던 이유는

어제 날짜 조선닷컴을 보니 이번 지방선거에서 '습관적 줄투표'가 줄었다고 분석하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그 논지가 꽤 절박해 보인다. 현 정권과 한나라당에 대한 심판이라는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의 당선에서 실오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것 같으니 말이다. "한나라당 소속 '잠재 대선주자군'으로 꼽히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지사에게 재선(再選)을 허락하면서 향후 정치 활로를 넓혀줬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조선일보의 속내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과연 그런 정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경기도지사의 경우는 무효표가 상당한데다가 사면초가에 처한 상황이라 할 수 있으므로 김문수 도지사의 재선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다. 또한 서울의 경우는 한나라당 후보가 구청장으로 당선된 강남, 서초, 송파, 그리고 중랑 4곳 중에서 중랑구에서만 한명숙의 득표율이 높았고 민주당 후보가 구청장으로 당선된 중구, 용산, 양천, 영등포, 그리고 강동 5곳에서는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의 득표율이 더 높았다. 그러나 강남구와 서초구에서 몰표가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면 오세훈 후보가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강원도와 충청도에서의 선거결과가 교차투표의 뚜렷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광역단체장 당선자의 소속정당과 다른 정당인 기초단체장 당선자의 수만 가지고 판단하기보다는 각각의 기초단체 투표자수를 비교해봐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변화를 원하는 민심이 도의 총괄책임은 '진보'에게 맡기면서도 '보수'에게 견제와 감시의 임무를 부여한 것으로 풀이된다"는 조선일보식의 분석은 작위적인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서울과 경기의 경우는 "변화를 원하는 민심이 시, 도의 총괄책임은 '보수'에게 맡기면서도 '진보'에게 견제와 감시의 임무를 부여한 것으로 풀이된다"는 식으로 의미를 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묻지마식 줄투표가 줄어든 것은 의미가 크고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일보가 이를 논거로 이른바 '잠재 대선주자군'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식으로 분석하는 것은 너무 앞서 간 아전인수라 할 것이다. 이것은 조선일보가 일부의 현상을 가지고 침소봉대함으로써 정부 여당이 이번 선거에서 패배한 의미를 축소하고 차제에 '잠재 대선주자군'을 띄워보겠다는 노림수도 담고 있는 것 같다.

서울시민인 나는 이번 선거에서 조선일보의 분석과는 상이하게 '줄투표(straight-ticket voting)'를 했다. 내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현 정부 여당으로는 안되고 어떻게든 제지해야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오세훈 시장이 재선되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지만 그것이 한명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아마도 한나라당에서 원희룡으로 후보단일화를 했다면 차라리 내가 선택하기는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이정희 의원 블로그 이미지 인용 ; <사랑하며 노래하며 아파하다> 출판기념 팬사인회)

내가 줄투표를 했다는 것은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의 의중에 있는 후보자들에게 투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원이 추진했던 야권 후보 단일화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현 정부 여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존중했고 정치현장에서 직접 겪고 있는 이 의원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이정희 의원의 의정활동을 꾸준히 지켜봐 왔던 나는 이 의원을 충분히 신뢰할만한 국회의원이라 판단하고 있었기에 투표용지를 받아들고서도 잠시 고민했을 정도였지만 결국 이 의원의 의중대로 투표를 했다.

무엇을 진보라 하고 무엇을 보수라 하는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진보와 보수로 구분해 본다면 한나라당의 텃밭에서 나고 자란 나는 보수성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정희 의원과의 입장차이도 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현재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정치인이 이정희 의원이다. 나는 한국에 '정치인'은 실종되고 '정치꾼'들만 남았다고 봤었는데 실종된줄로만 알았던 정치인이 나타났고 그를 통해 정치를 보고 있다.

나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보다는 옳은가 또는 그른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정희 의원을 신뢰하는 이유는 그가 진보 정치인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의정활동이 모두 옳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현 정부 여당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수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추진하는 대부분의 정책들이 옳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육문제와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내가 교육감과 교육의원까지 이정희 의원의 의중대로 투표를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 정부와 여당 그리고 조선일보는 이번의 선거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이리저리 말 돌리면서 피해가려고 하면 안된다. 특히 4대강 사업은 당장 중단해야 한다. 중단에 따른 부작용을 얘기하는데 이는 여론을 무시하고 강행한 당사자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일 뿐이고 지금 중단하는 것이 그나마 더 큰 부작용을 막는 방법이다. 정부 여당 특히 김문수 도지사는 4대강 사업이 진행되는 지역주민들은 찬성하고 있다는 논거를 들면서 4대강 사업추진을 공언하고 있는데 이는 대단히 어리석은 발상이다. 4대강이 지역주민들의 이해관계만 걸린 문제가 아니라 전국민과 후손들의 문제임에도 그 주변의 주민만 찬성하면 문제가 없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민주당은 이번의 선거결과를 마치 자신들이 잘해서 승리한 것인양 기고만장하고 있는데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좀 심하다. 나와 같은 성향의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표를 준 것은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현 정부 여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범 야권의 노력을 지지해 준 것이다. 나의 경우는 특히 서울 경기에서 광역단체장 후보를 하나도 내지 않으면서까지 단일화를 추진했던 민노당의 노력을 인정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이 숫자가 많지만 그만큼 민주당에 의문부호를 던지며 감시하고 있는 눈들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