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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추노' 마지막은 희망이 아닌 컴플렉스

배를 탄 이대길이 태양을 향해 활을 겨누고 살을 날리는 시늉을 한다. 이것이 드라마 '추노' 엔딩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희망의 메시지라기보다는 이카루스 컴플렉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대길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은 했지만 실제로는 그에 따르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시 세상의 근본적인 모순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도망노비를 잡아 원래로 되돌려놓는 추노질을 자처했고 그 댓가로 논밭뙈기를 사들이고 집을 장만했다. 그런 이대길이 태양을 갖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이대길의 컴플렉스라고 해야 한다.

송태하는 이대길의 희생으로 위기를 벗어나면서 언년에게 '청으로 가지 않고 그가 빚진 것 많은 이 나라를 위해, 혜원과 언년 두 이름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송태하는 직접 노비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 경험했으면서도 사회의 모순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고 수시로 그 말과 행동이 변경되어 왔다. 이런 송태하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송태하가 계속 석견의 곁에 머물렀다면 석견이 복권되는 때쯤이면 그 상황에 안주하고 말 것이고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언년과 송태하는 복합적인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 둘의 조합은 결코 상승효과를 낼 수 없으며 그 둘이 여전히 동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희망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야 한다.



말로만 새로운 세상을 읊조리며 행동하지 않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던 이대길이나 송태하보다는 더러워서 피해 살지만 자기가 거느리는 식솔들은 확실히 챙기는 짝귀가 오히려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황철웅은 석견과 송태하를 추격하는 것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와 장애가 있는 부인을 부여 안고 통곡을 하지만 이 또한 희망적인 메시지는 아니다. 목숨을 걸고 언년을 지켜내려는 이대길을 통해 자신의 컴플렉스를 자각했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분(박기웅)은 전형적인 우월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해도 그분이 마지막에 노비당에게 내뱉었던 말들은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드라마 '추노'가 진행되는 동안에 이렇게까지 지나쳤던 장면은 없었던 것 같기에 그 장면은 생경해보이기까지 했다. 박기웅의 입을 통해 나온 말들은 작가의 컴플렉스를 표출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표출인지 마치 누군가를 향한 저주(curse)로 느껴졌다. 박기웅의 연기로 살려내지 못했다면 이 장면은 불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과했던 것 같다.

드라마 '추노'의 가치는 새로운 세상과 그것을 꿈꾸는 희망에 대한 각각의 생각이 다 달랐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이대길을 비롯한 등장인물들 모두가 제각각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비당에 소속된 노비들끼리도 다 달랐고 서로가 가장 잘 통하고 연애감정까지 갖게 된 업복이와 초복이 사이에도 서로의 의견이 달랐다. 지나는 여행자를 붙잡아 그 몸이 침대보다 짧으면 잡아 늘여 침대 길이에 맞추고, 침대보다 길면 긴 만큼 잘라버렸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획일적이고 극단적인 선악 구분을 하려고 하는 여타 드라마들과 차별화하려고 했다는 데에서 나는 드라마 '추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드라마 '추노'에서 가장 용기있는 사람들은 업복이와 노비당 노비들이었다. 자신들의 이상을 계획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 바로 가장 단순무식해보이는 노비들이었다. 비록 그것이 집권세력에게 이용당하고 좌절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이 노비들이야말로 드라마 '추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업복이는 총 네 자루를 들고 홀로 궁궐로 들어가기 전에 평소 업복이를 구박하던 반짝이 아비를 돌아보고 반짝이를 구해줬으니 같이 도망가서 살라고 말하며 너무도 편안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분과 이경식을 차례로 사살한 업복이는 궁궐 수비대에게 제압당하고 열린 궁궐문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 아비를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그 환한 웃음과 무표정이 오히려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업복이를 지켜 보았던 반짝이 아비는 주먹을 불끈 쥔다. 바로 이 장면이 드라마 '추노'의 최고 명장면이었다.



반짝이 아비는 자신의 딸인 반짝이를 주인인 양반의 몸종으로 들여보내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저항하려고하기보다는 오히려 팔자타령으로 돌리던 사람이었다. 업복이는 홀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자기가 했던 일이 계속 전해지고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반짝이 아비는 그러한 업복이의 뜻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업복이와 노비당 노비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을, 그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업복이와 노비당 노비들의 이상과 의지 그리고 직접 행동했던 일들은 계속 전해질 것이고 후대에 또 누군가가 그 뜻을 이어받아 세상을 바꾸려고 분연히 일어설 것이다. 역사란 그렇게 누군가의 피를 먹고 흘러가지만 올바르게 기록되고 정신이 훼손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바뀌어가고 있다. 역사는 왜곡되지 않고 올바르게 기록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