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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길상사 먼 발치에서 뵈었던 '법정' 스님

97년도인가 98년도인가 나는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을 뵌 적이 있다. 그냥 먼 발치에서 나 홀로 스님을 바라보았던 것이니 스님을 직접 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때 뵈었던 스님의 그 형형(炯炯)한 눈빛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길상사에 갔던 때는 그 해 4월 초파일이었는데 당시에 내가 길상사로 발길을 옮겼던 이유는 '법정' 스님을 뵙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스님이 그 당시에 길상사에 계신줄도 몰랐지만 알았다해도 직접 뵐 마음을 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제3공화국 시절 '밀실정치의 현장'이었던 대형 요정 대원각이었다. 대원각의 소유주였던 김영한(1916∼1999)씨의 시주로 요정이 절로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10여년 가까이 김영한씨의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이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창건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새롭게 변한 길상사라는 절보다는 밀실정치의 현장이었던 대형 요정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가 궁금했었다.



그리고 나를 길상사로 가게 만든 또 한가지 계기는 노영심씨가 길상사에서 음악회를 연다는 소식이었다. '희망사항'에 이어 '그리움만 쌓이네'에 폭 빠져 있던 나는 노영심씨의 음악회를 꼭 보고 싶었다. 초파일 부처님께 불공도 드리고 노영심씨도 보고 노영심씨의 음악회도 보고 대원각이란 요정도 보겠다는 복합적인 목적을 가지고 갔던 곳이 바로 길상사다.

음악회가 시작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에 길상사에 도착해서 먼저 불공을 드리고 난 후 정치 거물들이 드나들었다던 대원각이란 요정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밀실정치가 이루어졌던 대형 요정 대원각의 예전 모습을 몰라서인지 어마어마한 역사적 현장에 와 있다는 감회는 별로 생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둘러보던 중 조그마한 집 앞에 서 계신 어떤 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으나 내게 낯 익은 스님, 그 분이 바로 '법정' 스님이셨다. '아, 스님이 여기에 계셨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다가가서 스님에게 말씀을 드려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먼 발치에서 스님을 뵈었지만 스님의 형형(炯炯)한 눈빛은 생생하게 내 기억속에 각인되었다.

내가 '법정' 스님을 알게 된 것은 좀 더 정확하게 법정 스님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다. 나는 책 읽기를 참 싫어하는 편인데 법정 스님의 글은 꽤나 많이 읽었다. 스님의 책을 사서 읽기도 했고 조선일보에 올라오던 스님의 칼럼도 빼지 않고 읽었다. 당시는 고승들의 수필집을 읽는 것을 좋아했던 시절이기도 했는데 법정 스님의 글은 치장하지 않고 간결했지만 어떤 감명이 있었던 것 같다.



스님이 스스로 '무소유'를 실천하며 '무소유'의 참된 가치를 널리 알려온 때문인지 다들 스님의 저서 중에서 '무소유'를 우선적으로 말하지만 나는 '산방한담'을 떠올린다. 내가 산방한담을 떠올리는 이유는 이 책을 읽던 중에 '스님의 글은 너무 관념적이다 못해 현학적으로 보이지까지 한다'는 의문이 생겨났는데 그에 대한 답을 내 스스로 찾을 수 없었고 그 후부터 법정 스님의 글을 조금씩 멀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살아오다보니 지금은 이 화두와도 같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지만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를 직접 실천하며 살지는 못할 것 같다. 나의 교만함과 오만함을 온전히 버리지 못한다면 나는 여전히 완전한 해답을 구하지 못할 것이고 '무소유'의 가치를 완전하게 깨닫지는 못할 것이다.

종교 간의 화합을 강조했던 법정 스님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인연을 맺으면서 종교간의 담을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님이 입적하자 이해인 수녀님이 법정 스님의 입적을 추모하는 글을 쓰셨다고 한다. 종교 지도자의 표상을 한꺼번에 보고 있는듯해서 감동의 크기가 더해진다. 나는 이해인 수녀님의 책은 거의 가지고 있을 정도로 수녀님의 글도 많이 읽었고 좋아한다. 법정 스님은 구도자로서의 고독을 담담하고 간결한 언어로 표현했다면 이해인 수녀님은 가슴 절절한 사랑의 언어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조선닷컴 사진 인용)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나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있던 어린왕자를 본 후 '어린왕자'를 다시 읽으며 관점을 넓히게 되었고, 이해인 수녀님의 '민들레의 영토'를 읽고 수녀님에게 편지를 쓰다 말기를 여러번했지만 결국 보내지는 못했었다. 이해인 수녀님의 추모글 중에서 '어린왕자, 민들레의 영토,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님'이 모두 등장하는 이 부분을 읽으니 갖가지 상념이 스쳐간다.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으니 옛날 길상사에서 뵈었던 스님의 꼿꼿한 자세와 형형한 눈빛이 떠오르고 세파에 시달리며 술과 담배에 찌들어서 어느새 내 눈은 투미해져버렸고 언제부턴가 땅바닥을 보면서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착잡한 밤이다.

법정 스님의 입적을 애도한다. 또한 이해인 수녀님이 암 판정을 받아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수녀님의 건강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