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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민폐언년의 최종희생자는 누구?

언년은 어쩌면 드라마 '추노' 최대의 오점이 될 지도 모르겠다. 언년은 마치 외계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드라마에 녹아 들지 못하고 혼자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다. 질박한 질그릇에 붙여 놓은 황금문양 같기도 하고 매끈한 도자기에 붙어 있는 껌딱지같기도 하고 여러면에서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언년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설정이 또한 연기자의 캐스팅이 과연 어땠을지 아직은 판단하기에 이른 시점이겠지만 현재의 언년은 불요불급한 그런 존재로 보인다.

현재까지의 언년을 보면 항간에 떠도는 것처럼 '민폐언년'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또한 언년의 민폐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언년은 계속 송태하와 동행하며 혼례까지 올리려 함으로써 조선비와 송태하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게 만들었고, 송태하와의 다정한 모습을 이대길에게 보임으로써 이대길이 추노질을 그만 두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고 이대길, 최장군, 왕손이가 서로 칼부림하게 만들며 셋이 결별하게 할 지도 모른다.

이처럼 언년의 민폐질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언년의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 있는 최종희생자는 과연 누구일까?

단서가 되는 안타까운 죽음 하나

세상에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지난 주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원손을 돌보던 궁녀의 죽음이었다. 궁녀는 개차반인줄로만 알았던 곽한섬이 사실은 원손을 구하기 위해 위장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되고, 한섬은 개차반으로 살아가던 때에 궁녀에게 치근덕거리며 했던 말들 중에 호강시켜주겠다는 말은 참말이었다며 우직한 사내의 속마음을 고백한다. 궁녀는 임금의 여자이니 현실적으로는 한섬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이지만 한섬의 듬직함에 궁녀도 마음을 열게 된다. 한섬은 궁녀에게 이름을 물으며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 말하고 궁녀는 조심스럽게 이름을 말하려고 하지만 그 순간 황철웅이 던진 죽창에 맞는다.

불의의 일격으로 숨을 거두며 뱉은 궁녀의 말 중에 '집은 한양 피맛골'은 들렸지만 이름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에 더더욱 안타까웠다. 궁녀역을 맡은 사현진의 연기가 우수한데다 우직하고 듬직한 사내인 곽한섬의 사랑이 좌절되는데 대한 아쉬움이 컸던 탓인지 궁녀가 누구인가 궁금했던 것은 나혼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추노' 제작측이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궁녀의 이름이 '장필순'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줬으니 말이다.



궁녀의 죽음은 피상적으로 보면 원손을 보살피는 손길이 언년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것 같은데 실질적으로는 이 드라마를 관통하고 있는 비극적인 결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궁녀와 혼인해서 호강시켜주는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한섬의 열망을 한방에 뭉개 버린 것이다. 바로 송태하와 곽한섬이 열고자하는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며 이 드라마의 결말은 비극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대길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이나 업복이가 말하는 세상도 오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송태하와 곽한섬이 말하는 새로운 세상 사이엔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송태하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기존의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것이라면 곽한섬은 궁녀를 혼인하고 호강시켜줄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 미묘한 차이가 작가의 착오에 의한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이 드라마의 전개에 어떤 변수가 될 지는 알 수 없겠으나 현재는 조선비와 송태하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있다.

어찌됐든 이대길과 송태하는 시대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고 종국엔 권모술수에 능한 추악한 정치권력의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다. 송태하를 따르는 일당은 언제든 세력을 규합할 수 있고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원손이 있으므로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라 정당성이 결여되었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현재의 살아있는 권력에겐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세력이므로 정치권력에 의해 직접적인 타격을 받아 희생될지도 모른다.

언년의 민폐, 이대길의 계획에 대한 단서를 흘리다

하지만 이대길의 경우는 현재까지는 기존의 어떤 정치세력과도 결부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우며 향후 송태하와 손을 잡지 않는다면 정치권력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느낄 존재가 아니다. 만약에 이대길이 독자적인 세력을 규합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정치권력에겐 반역세력이 되므로 명분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상대하고 진압하기가 송태하보다는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이대길의 세력이 나라를 완전히 뒤엎어버릴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이대길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인지가 대단히 불투명하다. 듬성듬성 흩어진 힌트도 월악산 짝귀와 숭례문 개백정밖에는 없는데 그들이 이대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숭례문 개백정은 이대길이 송태하를 쫓는 도중에 조그만 암자에서 만났던 땡초 명안이고 짝귀는 아직 출연하지 않았으나 이대길이 추포해 왔던 노비 모녀를 돈을 받은 후에 다시 구해준 뒤 "쓸데없이 국경으로 가지 말고 월악산 짝귀를 찾아가라"고 하는데에서 그리고 송태하와 언년을 위협하던 산적들의 입에서 언급되었던 적이 있다.



이런 이대길의 꼭꼭 숨은 속내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슬며시 스쳐갔다. 언년이 송태하와 혼례를 올렸다는 얘기를 들은 이대길이 절규하게 되고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동행하고 있는 설화에게 무용담처럼 아래의 말을 흘린 것이다.

"꼬맹아, 이 조선땅에 아주 흉악한 놈 세 명이 있어. 먼저 월악산 짝귀 그리고 그 위에 숭례문 개백정이. 그리고 그 놈들보다 한참 위에 이 조선팔도 이대길이가 있는거야."

이대길이 취중에 내뱉은 저 말은 남몰래 어떤 세력을 규합하고 있으며 그 우두머리가 이대길임을 부지불식간에 드러낸 것이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예고에 추노질을 그만 두겠다는 장면이 스쳐간 것으로 보면 그동안 이대길이 추노질을 해왔던 이유는 언년을 찾기 위해서였으나 이젠 언년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사라졌으므로 암암리에 키워 오던 도처에 흩어져있는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의도가 아닌가 추정해볼 수도 있다.

이대길은 정통무예를 익힌 훈련원 교관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송태하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무술실력을 가진 필적할만한 상대가 거의 없는 야생 호랑이와 같이 거칠고 날래다. 또한 대단히 영리하고 주도면밀한 면이 있다. 이대길의 세력이 위력적으로 커지고 그를 제거할 필요성이 대두된다면 이런 이대길을 정면 승부로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고 누군가가 이대길을 속여 유인한 뒤에 등에 칼을 꽂아야 할 것이다. 그럼 과연 누가 이대길을 유인하고 등에 칼을 꽂을 것인가?

그런데 이대길에게는 아킬레스건이 하나 있다. 바로 언년이다. 언년은 이대길을 무장해제시키고 판단능력을 완전히 정지시켜 넋을 놓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이다. 이대길은 이미 말을 타고 도망가는 송태하에게 던진 표창에 맞은 여인네에게서 언년의 옆모습을 보고 무장해제되어 무방비상태로 황철웅의 칼에 맞은 적이 있고, 백호가 펼친 언년의 초상을 본 순간 정신줄을 놓은채 백호가 초상화를 베고 대길을 향해 칼을 휘둘러와도 그 자리에 장승처럼 얼어붙어 꿈쩍도 하지 않았던 적이 있고, 큰놈이로부터 언년의 혼례 소식을 듣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채 자기의 칼로 큰놈이가 자살을 해도 모를 정도로 무장해제되었던 적이 있다.

언년의 마지막 민폐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물질이 낀 것처럼 왠지 까끌까끌하게만 느껴지는 민폐언년이 갖고 있는 살생부의 맨 마지막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은 결국 이대길이 아닐까? 이대길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낀 정치권력이 이대길의 아킬레스를 알게 된 후에 언년을 이용해서 이대길을 유인하고 언년으로 인해 무장해제된 이대길의 등에 누군가를 시켜 칼을 꽂는 비극이 이 드라마의 종착역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까지 이대길을 노리는 사람은 업복이와 천지호다. 업복이의 노비당은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고 노비당의 뒤에 숨은 조종자의 실체가 아직은 불분명하지만 업복이는 호랑이 사냥을 하던 관동포수답게 비열한 술수를 쓸 위인이 아니고 함께 추포되어왔던 모녀를 이대길이 구해주었다는 것을 아직은 모르나 차차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밀지를 받고 왜 죽여야하는지 영문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채 기계적으로 양반 둘을 사살해버린 맹목적인 면이 있다. 반면에 천지호는 비열함으로 똘똘 뭉쳐 어떤 비겁한 암수라도 기꺼이 사용할 수 있는 자인데 '대길아, 나 언니야.'라며 대길을 잡아 먹을듯이 쏘아보던 천지호의 눈빛이 뇌리를 뜨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결과적으로는 정치권력의 권모술수에 속아 서로가 얽힌채 시대의 희생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 각자가 무엇을 바꾸려고 했는지,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왜 죽이고 죽어야하는지도 모르는채 '사는게 말이다... 참 지랄맞다... 세상 참 지랄맞다.'고 되뇌이며 하나씩 사라져 갈 것이다. 이미 정치권력들은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도 천지호 패거리들을 토사구팽하듯이 학살해버린 전례가 있다. 추악한 정치권력들에게 피지배층은 그저 필요할 때에만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궁 안에서의 세상과 궁 밖에서의 현실은 서로 달랐을 것이다.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고... 그게 인생이야."

드라마 '추노'를 관통해서 흐르는 주제는 어쩌면 이 한마디로 모아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