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추노' 정말로 불필요했던 언년의 회상

드라마 '추노', 이미 찍어 놓은 드라마라서인지 화면의 낭비가 없이 스토리 전개도 빠르고 군더더기 없이 잘 짜여져 있다. '픽션 사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기본적인 상식을 거부하면서 판타지 사극이란 이름 뒤에 숨으려하던 질 낮은 드라마에 극본상까지 안기던 웃기는 현상의 주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드라마 '추노'에서 가장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바로 언년과 송태하가 동행하는 것이다. 그 종착점에서 송태하를 쫓는 이대길이 언년과 만날 것이라는 가능성이 존재했을 때까지는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대길이 언년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은 뜻밖에도 언년이 집의 호위무사인 백호 때문이었으며, 송태하가 제주도에서 원손의 위험을 인지했으면서도 끝까지 언년과의 동행을 고집하는 것은 아무리 극의 전개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더라도 불필요해 보인다.



제주도에 온 송태하는 옛 부하인 한섬을 찾아가지만 이미 한섬은 원손(비명횡사한 소현세자의 마지막 아들 석견)을 데리고 피신했다. 여기서부터는 상황이 상당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한섬이 남긴 메세지를 찾는 송태하의 침착함은 칭찬할만하지만 이 곳에서부터는 언년과의 동행은 점점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섬의 흔적을 쫓아가다가 원손을 모시던 궁녀가 떨어뜨린 신발을 발견하게 되고, 새 세상을 열겠다는 송태하의 얘기를 들은 언년은 '큰일 하는데 방해되지 않겠다'며 송태하에게 혼자 가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송태하는 언년의 손을 잡고 뛰겠다며 언년의 손을 잡아 끌더니,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같이 가겠다던 송태하는 어느 순간 언년이를 앞질러 가버린다. 그러다가 칼까지 길 위에 내려놓고는 사라져버렸다. 칼싸움하러 가는 장수가 칼을 놓고 가버린 송태하의 일련의 언행은 어떻게봐도 개연성과 설득력이 전혀 없다.

이러한 불필요한 설정을 했던 원인과 그 불필요함을 더욱 더 도드라지게 했던 것이 바로 언년의 회상 장면이었다.

언년은 송태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무작정 뒤를 따라가다가 송태하가 놓고 간 칼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장수가 칼을 놓고 간 것은 떠난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겠다는 뜻'이라던 송태하의 말을 회상한다. 그러나 이 회상장면은 정말로 불필요했다. 송태하가 놓고 간 칼을 본 시청자들은 누구나 언년의 회상과 똑같은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마치 지아비를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송태하의 칼을 안고 하염없이 앉아 기다리는 언년, 그에게 다시 돌아 온 송태하가 '기다리셨습니까?'라고 묻고 언년이 '다시 온다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하는 장면만으로도 충분했음에도 여기에 언년의 회상을 끼워넣은 것은 과유불급의 쓸데없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면 이 장면은 시청자에게 똑같은 내용(송태하의 말)을 5번이나 반복해 보여주는 효과가 됨으로써 극의 전개가 약간 느슨해졌고 화면의 낭비가 생겨버렸다.

결국 언년의 이 회상 장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바람에 송태하와 언년의 생뚱맞은 키스신과 같은 오버한 장면들이 튀어 나왔던 것이고, 원손인 석견을 등에 업은 한섬의 독백은 작가의 궁색한 자기변명으로밖에 안보이는건 당연한 것이다. 송태하가 반역을 도모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원손의 생존이 필수불가결한 전제이고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즉 원손이 생존하지 못하면 송태하도 없고 송태하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도 없다. 그런 원손의 안위가 누란지위에 처했음에도 한가하게 여인네 치마꼬리나 쫓아가는 송태하가 과연 나라를 세울만한 사내의 자격이 있을까?

언년의 회상 장면을 상상하고 고집하지 않았다면 생뚱맞게 보이는 장면들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고, 송태하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언년과 대비되는 이대길의 고독한 절규는 훨씬 더 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