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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선덕여왕' 페어(pair)바둑을 보는 것 같았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대한 글이 확연히 줄어든 것을 보니 드라마가 끝나기는 한 것 같다. 내가 용인할 수 있는 한계치를 훨씬 넘기고서야 이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게 되었는데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마치 페어바둑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페어 바둑이란 2인이 같은 조가 되어서 한 수씩 교차로 바둑을 두어 나가는 것을 말하는데 대국 중에는 서로가 상의할 수 없으므로 나중에 두는 사람은 먼저 두는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페어바둑은 한사람이 잘 한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호흡이 잘 맞아야 된다. 젖히고 끊으며 강하게 버텨야 할 자리에서 안이하게 물러선다거나 늘고 지켜서 나중을 위해 힘을 비축해야 할 자리인데도 젖히고 나가 끊어버린다면 그 바둑은 힘들어진다. '모르면 손 빼라'는 격언대로 먼저 둔 사람의 의도를 모르거나 자신이 없으면 상대가 받지 않을 수 없는 곳을 두어서 먼저 둔 사람에게 넘기는 것도 좋은 한 수이나 끝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 바둑이므로 페어 바둑은 무엇보다도 두 사람 사이의 팀웍이 중요하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같은 조인 두 사람 모두가 시청률을 의식하고 서로가 경쟁을 해서인지 수습하는 사람은 없고 오로지 나가서 젖히고 끊으며 공격 일변도로만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역사는 왜곡되다가 아예 완전히 새로운 역사를 쓰고 말았다. 아무리 무리수라도 통하기만 하면 멋진 한 수가 되는 것이고 드라마 선덕여왕이 두었던 무리수들은 모두가 호수(好手)로 둔갑되었는데 이것이 아이러니다. 재미만 있다면 어떻게 바뀌어도 창작이란 명분으로 다 용서가 된다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난감하다. 그러면서도 다른 나라의 창작물에 대해서는 비난하는데 그것은 한국을 비하했다는 이유에서일 뿐이다. 아마도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만 아니고 재미만 있다면 한국의 역사가 어떻게 변색되어도 한국인들에 의한 아무런 문제제기는 없을 것이다.

사라져버린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은 실질적으로 '미실 여왕'이었고 선덕여왕은 그저 형식적인 허수아비 여왕일 뿐이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을 그려내겠다던 드라마 초기의 의도는 어디로 실종되어 버렸을까? 덕만이 왕이 되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당위성도 찾을 수 없는데 드라마속에서 덕만이 왕이 된 것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미실은 진흥왕을 독살하고 그렇게 서거한 진흥왕에게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하셨습니까? 보십시오. 미실의 사람이옵니다. 미실의 시대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다면 덕만은 사람을 얻어서 왕이 되어야 했는데 덕만은 사람을 얻은 것 같지도 않다. 리더십이나 카리스마에서도 미실은 덕만을 압도했고 정변을 일으킨 미실은 국경의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 명령하며 자결을 택할 정도로 신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진정성에서마저도 덕만을 눌렀다.



도대체 덕만은 왜 왕이 되어야 했나? 그래야 할 당위성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미실이 왕이 되었어야 했고 그랬다면 난 모든 비판을 접으려고 했었다. 그건 역사와의 완벽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작진들은 미실을 왕으로 만들어놓고 그냥 죽여 버렸다. 덕만이 왕이 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나 당위성도 없는 상태로 만들어놓고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을 송두리째 모욕한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사극이 아닐까?

드라마 선덕여왕은 사극이 아니라 드라마일뿐이라고 한다. 나도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지만 이것은 그냥 일시적인 도피처일 뿐 드라마 선덕여왕은 사극이 맞다. 역사속 인물들을 모두 등장시키고 그 시대를 그려내면서 사극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곤란하다. 대표적으로 덕만을 왕으로 만들었던 것은 제작진들도 이 드라마를 사극이라고 생각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사극이라고 하더라도 역사를 기록에 나와 있는대로 서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요소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각색된 설정은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게 있다. 나는 그것을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역사'라고 부른다.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역사를 무시하고 각색을 한 창작물이라면 그것은 그냥 '허섭스레기'에 불과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렇지 않고 사극이 아니라고 주장할 요량이라면 역사속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해당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을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진위여부마저도 불확실한 서적의 미실이라는 특이한 인물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작가들의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가 큰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도 드라마 속에서는 작가들의 신선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면들도 대단히 많았다. 굳이 선덕여왕 전후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 써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는 충분히 재미와 시청률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로지 미실에만 집착해서 미실을 살리기 위해 덕만과 유신을 모두 죽여버리고 역사 왜곡이란 멍에를 쓰게 된 이 드라마가 아쉽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광고매출로 433억원을 벌어 들였고 일본과 베트남 등 해외 판매액도 720만달러(약 84억원)를 넘어섰으며 이미 제작비 200억원을 훨씬 넘는 매출로 흑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선덕여왕은 다양한 부가 상품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런 파급효과까지 합한다면 드라마 선덕여왕의 총 매출액은 수척억에 달할 전망이라고 한다. 문득 우리 모두는 자본이 만들어 낸 시청률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룡에 패배하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에 이 드라마의 성공이 왠지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