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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선덕여왕', 뱀이 드라마에 출연했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는 뱀이 출연했었다. 뱀은 무려 세 번씩이나 드라마속에 등장했었다.

첫번째는 덕만과 소화가 피신한 타클라마칸 사막까지 쫓아 온 칠숙이 덕만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였고, 두번째는 계림으로 돌아 온 덕만이 천명과 만나서 도망치는 장면에서였으며, 세번째는 낭도가 된 덕만이 처음 참가한 전투에서 용화향도는 알천의 지휘하에 백제의 화살부대를 기습하는 작전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 장면에서 뱀이 등장했었다.

칠숙은 뱀을 무서워하고 근처에도 오지 못했고, 천명은 자기에게 찾아 온 뱀을 무서워하고 결국은 덕만에게 뱀을 넘겨주었고, 시열은 뱀이 팔에 붙은 것에 겁을 먹고 덕만이 치워주려고 다가가지만 벌떡 일어서서 뱀을 털어내며 백제군에게 기습작전을 들켜버려서 신라군 전체를 곤경에 빠지게 할 뻔했다.



뜬금없이 무슨 뱀 얘기인가 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세 번씩이나 등장한 뱀은 각각의 장면마다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 같았고 내가 이 드라마를 높게 평가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 드라마 제작진들이 상당한 준비를 했고 탄탄한 대본을 바탕으로 긴 호흡으로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이 뱀이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성급한 평가였으며, 뱀은 그냥 마땅한 소품이 없어서 등장시켰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후에도 드라마를 보면서 또 뱀이 등장하지는 않는지 찾게 되기도 했지만 더 이상은 등장하지 않았다. 방대한 사료들로 드라마 선덕여왕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갓쉰동'님이 언젠가 모란에 대한 포스팅을 하셨는데 나는 모란을 찾기보다는 뱀을 찾고 있었으며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를 더 크게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용포나 왕의 처소 여기저기에서 용 문양은 많이 등장하고 심지어 미실의 찻잔이나 의자에도 용 문양은 많이 등장하기는 했었다.



뱀은 고대인들에게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는데 신라에 관한 기록에도 뱀 또는 용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고 심지어 신라 토우에도 뱀문양이 등장한다.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사릉(蛇陵 ; 뱀 무덤) 얘기가 나오고 신라 경흥왕은 뱀이 있어야 편안히 잘 수 있다며 뱀과 함께 잠을 잤다고 하는데 '왕이 잘 때에는 수많은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면서 왕의 침소로 올라와 왕을 보호하듯이 가슴을 뒤덮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삼국유사에 나오는 뱀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긍정적 의미인 것으로 보이는데 뱀은 신성하면서도 꽤 친숙한 동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신라의 국조인 박혁거세의 왕비를 낳은 것은 계룡(鷄龍)이며 문무왕이 사후에 호국용(護國龍)이 되었다는 설화 등에는 용이 개입되어 있다. 이처럼 뱀과 용이 함께 등장하는데 그 이유가 당시에는 뱀을 용과 동일시했던 때문이었는지 신라를 기록했던 고려인들이 신라의 격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에서였는지 알 수는 없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덕여왕지기삼사설화(善德女王知機三事說話) 중에 옥문지(玉門池)가 등장한다. 신라의 선덕여왕 때 영묘사(靈廟寺) 근처 옥문지(玉門池)에서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3~4일 동안 떼지어 울었다는 보고를 받고 선덕여왕은 급히 군사를 여근곡(女根谷)에 보내어 백제 군사를 토멸하라 지시한다. 선덕여왕이 어떻게 백제군이 잠복해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에 대해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개구리는 눈이 불거진 모양이 성난 형상이니 군사의 상징이고, 옥문이란 여근(女根)이며, 여자는 음(陰)인데 그 색은 희고 흰색은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男根)은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단지 개구리의 형상이 백제군을 상징하고 있다고 유추해냈다는 것인데 설득력은 떨어진다고 하겠다. 아마도 당시에는 각 나라들의 건국설화나 토템 등을 근거로 해서 적국을 비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떤 동물을 사용하지 않았을까하는 정도를 추정해볼수는 있겠으며 이것이 설화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한다.



이러한 설화들을 보면 신라인들도 스스로를 '신룡 또는 큰 뱀의 나라'라고 여겼던 것이라 추정하게 할만하다. 하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이 초반에 뱀을 등장시켰던 것에서 이런 것을 반영하려는 어떤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단지 마땅한 소품이 없어서 뱀을 등장시켰던 우연이었고 너무 자주 등장시키기는 곤란했기에 세 번에서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상당한 기대를 갖게 했던 것도 뱀의 등장이었고 끝내 실망하게 한 것도 뱀이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뱀이 사라지면서 드라마의 내용도 의미도 모두 실종되어버렸기에 드라마에 등장했던 뱀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