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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미실 "서쪽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석양"

드라마 선덕여왕 이번 주 방송을 보면 그동안 수면위로 떠오르던 연장방영에 대한 의지는 없는게 아닌가하는 추정을 하게 한다. 불과 몇 주 정도의 방송분과 비교해보면 이번주는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상당히 급박하게 몰아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마치 결승점을 앞에 두고 막판 스퍼트를 하고 있는 운동 선수를 보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물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겠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면 미실은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미스 신라'라는 칭호도 부족할만큼의 빼어난 외모를 지녔고, 역사를 통틀어서 어떤 창기(娼妓)에도 뒤지지 않을 색공술을 터득해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쥐락펴락하고, 그녀의 말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목숨까지도 던질 수 있게 조종하고 있으며, 상당한 식견과 뛰어난 통찰력을 지녔으며 정공법(正攻法)과 기습법(奇襲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정도로 병법에도 출중한 지략가이다.

이 정도면 참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미실의 정적(政敵)이라면 섬뜩함마저 느낄 것이다. 실제 드라마에서도 모두가 미실을 무서워하고 황실조차도 그녀가 무서워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골품제도의 틀 안에서 황권을 유지해나갈 정도일 뿐이다. 미실도 역시 골품제도의 틀을 깨지 못해서 단지 황후가 되려했을 뿐이고 골품제도라는 견고한 틀이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아서 신국의 실질적인 일인자에 머물러 있을 뿐이지 황실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러던 미실이 '여성의 신분으로 부군이 되겠다고 선언한 덕만'과 '골품제도는 천한 제도라고 으름짱을 놓은 춘추'에게 고무되어서 스스로 왕이 되려고 군사정변 소위 '미실의 난'을 일으킨다. 물론 덕만이 선덕여왕에 오를테니까 미실의 난은 실패한 것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런데 덕만에게는 서현과 그 아들 유신 그리고 유신과 결탁한 가야 유민 세력이 있다고는 하나 이런 정도의 어마어마한 세력을 지닌 미실이 치밀하게 계획된 군사정변을 일으켰다면 과연 실패했을까 싶기도 하다. 또한 이 무시무시한 미실이 실패하고 최후를 맞이한다면 아무리 정적이라고는 하지만 신국으로서는 커다란 손실이고 만약에 미실이 실존인물이었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미실이 실존인물이었고 이렇게까지 대단한 인물이었으며 여왕이 되겠다고 군사를 동원해서 난을 일으키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미실은 역사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을까? 무서움을 느낄 정도로 완벽하고 매력적이기까지 한 미실이 정변까지 일으켰는데도 역사서에 단 한줄도 남김없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었다는게 납득하기 어렵다. 드라마속 미실의 입을 빌린 작가들의 의도처럼 반란의 수단과 방법이 너무나도 저열하고 비겁하고 치졸해서였을까?

일단 가정을 해 볼 수는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즉위할 즈음에 즉 진평왕이 죽기 1년전 인 631년 칠숙과 석품이 여왕 즉위에 반대하며 난을 일으켰지만 왕은 반란을 알아채고 칠숙을 붙잡아 목을 베고 9족을 멸하였고 석품도 잡혀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칠숙은 이찬 석품은 아찬이었는데 이들이 반란을 주도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서 그보다 더 높은 실력자에 의해서 주도된 반란이었고 그것을 칠숙과 석품이 대신 뒤집어썼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가능해지고 이 배후세력의 핵심인물이 미실이라는 상상도 가능해진다.

실제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미실의 난의 죄를 칠숙이 대신 뒤집어쓸수도 있다는 복선을 깔아놓았는데 드라마로만 본다면 이런 상상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두가지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렵게 된다. 첫째는 칠숙은 이찬 벼슬까지 지냈으며 칠숙이 반란을 일으킬 즈음에 미실은 사망했을 것이므로 사실(史實)과는 다르다. 그리고 둘째는 역사적으로 여자가 왕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난을 일으킨 인물은 칠숙과 석품이었는데 그런 그들이 오히려 여성을 왕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반란을 주도한다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또한 다음 주 예고편을 보면 소화라는 변수가 등장한다. 칠숙이 소화를 숨겨주는 장면과 소화가 옥새를 감추는 장면이 언뜻 스쳐지나갔는데 마지막 순간에 칠숙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 미실의 난은 어떻게 결론지어지고 미실은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 궁금해지는 장면이다.

칠숙의 목을 베고 9족을 멸하였다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진평왕은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반란세력을 처절하게 제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많은 인물들의 기록이 사라졌거나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었을수도 있다는 추정을 해볼수도 있다. 그러나 9족을 멸하였다는 이찬 칠숙의 난은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선덕여왕 16년(647년) 상대등 비담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 위해 염종 등과 더불어 일으켰던 반란도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상대등 비담의 난은 그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등 왕실이 위기를 맞을 정도로 대규모였고 사태도 매우 심각했었지만 진압되었고 비담도 역시 9족을 멸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왜 미실에 대한 기록은 사라져 버렸을까? 황실조차도 벌벌 떨게 만들었고 덕만과 왕위경쟁을 하고 정변까지 일으켰는데도 말이다. 미실이 이런 정도의 대단한 실존 인물이었다면 9족이 아니라 9족에 9족을 멸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얘기는 전해지게 마련이다. 설사 미실이 실존인물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결론이 존재한다면 드라마 선덕여왕의 이런 상상은 기본을 망각한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또 드라마에서 '미실은 이(理)에 맞지 않는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새삼스레 얘기하고 있는데 지나간 얘기들을 보면 근래의 이 말은 회의감(懷疑感)을 갖게 한다.

사실 미실은 실존 인물이었을수도 있고 아니었을수도 있다. 그러나 실존 인물이었다고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주도면밀하고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미실은 황실의 권력다툼에 이용당했고 그 과정에서의 과도하게 문란한 생활을 모두가 감추기에만 급급했기에 사록(史錄)에서 사라졌을거라는 추정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 진위여부를 떠나 화랑세기 필사본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롭다.



어쨌거나 이제 드라마속 미실의 최후는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미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할 것인지는 드라마를 봐야 알겠지만 처형당하거나 자결하거나 암살되거나 셋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만년에 중이 되었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따르기엔 드라마 선덕여왕은 너무 선을 넘어버린 것 같고 드라마속에서 천명이 미실측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마야황후가 미실에게 퍼부었던 저주가 새삼스럽다.

"네 이년. 네 년도 죽을 것이다. 네 년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빼앗기고 짓밟히고 혼자서 외로움에 떨다 죽을 것이다. 잠을 자도 잘 수 없고, 먹어도 먹을 수 없고 살아도 살 수 없고, 송장처럼 썩어가다가 비명을 질러도 소리가 나지 않은 채로 죽을 것이다. 비석도 없이, 무덤도 없이, 흔적도 없이 죽으리라. 하여 역사에 네년의 이름은 단 한글자도 남지 않으리라."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내각제를 매개로 한 정계개편 의사를 피력하면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서쪽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석양처럼 마지막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제 드라마속 미실도 서쪽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석양이 되어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다. 드라마속에서와 같은 정도의 대단한 인물이 실존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렇기에 석양 속으로 사라지려고 풀섶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드라마속 미실이 더욱 가슴 아프고 안타깝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