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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내딸 서영이' 끝내 밝히지 않고 묻어 둔 거짓말

 
 
 
작가는 끝내 거짓말 한 가지는 밝히지 않고 묻어 둔 채 해피엔딩으로 끝을 냈다. 드라마 '내딸 서영이'가 해피엔딩으로 가기 위해서는 끝내 밝히지 말아야 됐을 그 거짓말, 결국 이서영의 거짓말로부터 시작된 사랑과 갈등을 소재로 드라마를 끌어가던 작가의 메시지도 함께 아리아리해지고 끝내 묻혀버렸다.
 
이서영의 거짓말에 대해 작가가 애초에 세웠던 가치관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서영의 거짓말과 그 외의 거짓말들로 인해 쓰나미처럼 몰아쳤던 갈등을 대충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자', '때를 놓치면 후회한다'는 정도의 말로 얼버무리고 끝내기엔 영 깔끄러워서 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쭉 들었던 생각은 늘어지게 팔자 좋은 차지선이 주인공같다는 거였다. 세상에 이보다 더 속편한 사람은 없어보이는 차지선으로 인해 이서영은 패륜아가 되었고 윤소미는 비정한 엄마가 되었고 강기범은 돈으로 권위를 세우는 못난 남자가 되었고, 한마디로 차지선의 속을 불편하게 만들면 나쁜 놈이 되었고 차지선의 기분을 맞춰주면 사기꾼 마술사도 좋은 놈으로 둔갑되었다.
 
로얄패밀리인 차지선이 정략결혼한 처지까지 지대한 공감과 동정을 받는 이상현상이 일어나고 마침내 원하던 바를 쟁취했으니 차지선이야말로 드라마의 갑이다. 언제부턴가 드라마의 단골소재로 등장하는 로얄패밀리들끼리의 정략결혼, 그건 그들만의 문제고 그것을 대하는 그들의 가치관 또한 일반 시청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로얄패밀리들 간의 정략결혼은 그로 인한 부의 편중과 세습 그리고 발 벗고 따라가도 못 따를 불공정 경쟁이 심화될 때가 문제고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뿐일 것이다.
 
차지선의 정략결혼이 공감과 동정을 받는 것은 어쩌면 신데렐라 컴플렉스의 진화형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근사한 왕자님이 나타나 데려가주기만 하면 감지덕지하고 황송해하던 신데렐라에서 이젠 각종 기념일 챙겨라 근사하게 이벤트 해라 자기만 바라보고 사랑해라 등등의 다양한 요구를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안드로메다형 신데렐라로 진화하고 있다는 현상 말이다.
 
안드로메다의 여인들
 
여느 드라마도 그렇지만 '내딸 서영이'에 등장하는 여인들도 하나같이 정신이 안드로메다에 가있어 현실과는 동떨어진 여인들이다. 그것이 다소 과도하게 설정된 캐릭터가 차지선인데 작가는 차지선의 심리상태를 최호정을 통해 에둘러 표현해낸다.
 


 
최호정은 이서영이 강우재와 이혼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상우가 다시 강미경과 사귀게 될 거라는 의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혼자 속으로 끙끙 앓으며 괴로워한다. 바로 차지선이 강우재에게 얘기했던 의심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제일 쉽게 자라는 게 뭔 줄 아니? 의심. 작은 점 같았던 게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눈도 멀게 하고 귀도 멀게 하고 마음도 얼어붙게 하고 분노가 됐다가 사람 미치게 하지".

 
최호정은 자기가 바라던 것을 이상우가 하나씩 해주자 좋아하지만 블로그를 보고 해주는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안절부절하고 심지어 이상우가 동료와 전화하며 어쩔 수 없이 해주는 거라는 얘기를 엿듣자 그 오해는 극에 달한다. 최호정은 의무적으로 마지못해서 해주는 것은 원치 않으며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해달라는 얘기인데 이건 뭐 해줘도 문제 안해줘도 문제 어느 장단에 맞춰달라는 건지 진심으로 해주는 건 어떤 거고 의무적으로 해주는 건 어떤 건지 안드로메다형 여인들의 어법은 당최 어렵다.
 
하여튼 차지선의 신혼 초 생활 양태는 최호정의 모습과 상당부분 닮아있었을 것 같다. 첫 눈에 반한 남자와 결혼해서 사소한 의심과 오해로 불신을 키우며 혼자서 끙끙 앓고 진심으로 뭘 해달라고 떼쓰고, 차지선과 최호정의 정신상태와 행동양태는 상당히 유사하다. 다만 양쪽 가문의 경제력에서 차이가 크고 강기범과는 다른 어법의 이상우로 인해 최호정의 의심과 오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않았다는 차이만 있다.
 
"거짓말은 절대 안하는 차지선이야!"
 
차지선은 친구인 김강순에게 "나는 빈말은 살짝 하지만 거짓말은 절대 안하는 차지선이야!"라고 말한다. 살면서 거짓말 한두 번 안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차지선은 의도적으로 남을 속이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인 것만은 맞는 듯하다. 다만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또한 자기의 말로 인해 상대방이 어떤 상처를 받게 될지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않고 말을 마음껏 내뱉는 게 문제다.
 
이를테면 이서영을 빤히 쳐다보면서 "솔직히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가 있니? 남편이 하늘로 떠받들지, 시아버진 오냐오냐지, 시동생 벌벌이지, 손 벌려서 니 체면 구길 친정 식구도 없고"라고 말해서 당황스럽게 만든다거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난 후 어쨌든 품어주기를 기대하며 찾아온 강성재를 빤히 보며 "그러고 보니까 네 눈매가 네 엄마 닮았다. 참 많이 닮았어"라고 해서 내쫓는 식으로 말이다.
 
차지선이 물론 거짓말도 한다. 이서영의 거짓말이 드러났을 때 이서영을 내쫓으며 했던 거짓말이다. 실은 자기 아들 강우재를 위한 행동이었으면서 그 사실을 숨기고 모질게 대하며 내쳤다. 강기범도 마찬가지로 강우재를 위해 이서영과의 이혼을 더 크게 종용했던 것이었다. 한데 차지선은 이 또한 강기범만의 문제로 몰아서 마치 강기범이 이서영을 내쫓은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작가는 차지선을 통해서 대체 어떤 메시지를 투영하고자 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차지선의 행실머리를 보다보면 굉장히 난감하다.
 
작가는 드라마 전반적으로 거짓말을 등장시키면서 끝내 한 가지 거짓말은 밝히지 않고 묻어버린다. 이상우와 강미경이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거짓말이야말로 강우재 부모나 특히 최호정의 부모가 알게 된다면 기함할 거짓말이 아닌가! 이 엄청난 거짓말을 감춘 채 강미경은 미국으로 보내버리고 이서영과 이상우의 합동 결혼식으로 끝을 내는 장면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감당할 수 있는 일만 저지른다'는 이상우의 설명이나 강미경은 철 없던 여고시절의 첫사랑을 만난다는 것으로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하다. 이서영의 거짓말로 인해 벌어졌던 대소동이 해피엔딩으로 갈 수 있었던 데는 이상우 강미경 과거 커플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거짓말로 인한 해피엔딩을 결국 거짓말로 풀어낸 것이니 엉터리도 이런 엉터리가 따로 없다.

 
신데렐라가 먹은 사과는 독(毒) 사과인가?
 
'내딸 서영이' 티저 영상을 보면 이서영은 사과를 따먹으나 시간이 흐른 후 사과를 아버지 이삼재에게 건네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드라마의 줄거리가 이 티저 영상에 그대로 함축돼 있는 것이다. 독 사과를 따먹은 이서영이 결국에는 아버지에게 사과를 하게 되는, 그런 뻔한 스토리로 짐작할 수 있는 티저였다. 드라마가 종영되고 보니 아버지 이삼재가 이서영의 독 사과를 대신 먹었든가 해독했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연상시키는 흔들의자로 아버지의 희생을 얘기하려던 것이었나 하는 정도의 소감이 더해지긴 했다.
 
'내딸 서영이'는 차면 기울고 기울면 찬다는 이치를 기준으로 삼아 기승전결을 명확히 구분해놓은 특이한 드라마였다. 아무래도 신데렐라류 드라마이다 보니 막장 요소가 필수적이긴 하지만 이서영이 강우재와 결혼하는 도입 부분은 깔끔한 전개로 인해 진부하기보다는 참신했다. 특히 '애먼'이란 대사가 나왔을 때는 신선하게 들렸을 정도로 잘 짜여진 드라마였다. 이서영이 독 사과를 따먹고 강우재와 결혼한 후부터는 촬영 일정 탓인지 다시 '엄한'으로 돌아갔고 남발되는 우연 등으로 진부해졌지만 말이다.
 
우연이 남발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장면들이 많은 것은 흠이지만 그래도 그를 통해 뭔가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가의 재주는 대단하다. 순전히 우연이 겹쳐진 급작스런 이삼재의 복막염이란 막장의 설정을 통해 여러 인물들의 갈등을 해소한다거나 이삼재의 복막염이란 소재로 지루하게 진행하다가 이서영과 강우재가 서로의 속마음을 열고 사랑을 확인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여담이지만 드라마 작가는 진안과 어떤 인연이 있기에 드라마마다 진안을 세세히 소개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예쁘고 똑똑한 신데렐라가 살았는데 계모가 신데렐라를 못마땅하게 여겨 독이 든 사과를 먹여 숲에다 버렸는데 백마 타고 나타난 왕자님의 키스로 되살아난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았다."
 
이걸 보자마자 대체 무슨 헛소리냐고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쏟아지는 신데렐라류 드라마의 홍수 속에 시청자들도 이런 짬뽕된 스토리를 당연한 듯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여튼 '내딸 서영이'는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신데렐라가 근사한 왕자님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처럼 여러가지 얘기가 우연을 가장해 한데 짬뽕된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