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보상자 보기/엔터테인먼트

알리, 방송활동 일시 중단이 최선이었다




미련곰퉁이의 하소연인가, 상처투성이의 넋두리인가, 켜켜이 묻어 두었던 응어리를 풀어내는 한을 품은 여자의 한풀이인가. 아직 자기의 아픈 기억에서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어린 영혼이 어떻게 타인의 상처를 위로할 수 있다는 치기를 부렸던 것인지 참으로 애처롭다.

자기의 손목을 잘라 섬에 던져서 승자가 되는 전설을 좇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었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정작 포기해야 할 것은 방송활동 일시 중단이었고 그랬다면 자기 스스로 아픈 상처를 다시 헤집으며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이러한 선택이 알리에게는 당장은 괴롭더라도 해원(解冤)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들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이 문제에 연관되어 고통받게 될 애꿎은 피해자들의 처지에서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봤었다면 이런 선택이 알리 본인에게는 물론 뜻하지 않게 연관되어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며 괴로워해야 하는 당사자들에게도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이제 막 날갯짓을 시작한 그 파들거리는 날개를 꺾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거세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면서 날개를 펴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일시적으로 방송활동을 중단한다고 가수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 자기의 손목을 잘라내는 것을 선택하게 된 것은 털어내지 못하고 속으로 쌓아두었던 파들거리는 자신의 원한에 대한 집착이 그렇게 표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알리, 참 여러가지로 사람을 놀래키는 가수다. 언젠가는 통과의례처럼 유명세를 치를 거라는 정도의 생각은 했었지만 그게 차라리 성형의혹과 같은 신변잡기 정도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데 이번의 경우는 뮤지션이 작사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서 이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능력의 한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므로 거의 치명상이라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알리의 문제된 가사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알리를 비판하는 불특정 다수가 마녀사냥을 한다고 보기는 어려웠기에 알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비판은 타당했다. 일관적이지 않은 보조 관념으로 이루어진 메타포어를 사용해 놓고는 원래의 의도가 잘못 전달됐다는 식으로 해명한 것은 알리의 판단이 틀렸고 그게 오히려 더 큰 오해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고 보았다.

알리가 자기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진정성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는 여전히 문제의 본질을 가사의 진정성 여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한데 이는 알리와 그 주변 인물들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진정성의 여부는 지엽적인 문제이지 본질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오히려 다르게 비약되거나 왜곡될 여지가 있고 또다른 비수가 되어 알리에게 돌아가 더 쓰라린 생채기를 낼지도 모른다.

알리가 노래 제목으로 선택한 피해자(이하 '피해 당사자')의 사건은 누구든 함부로 꺼내서는 안된다. 그때의 상처를 다시 꺼내기 위해서는 피해 당사자가 얼마나 그 충격에서 벗어났고 그 상처를 노래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이 사회가 그 충격적인 사건을 노래 한자락으로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는 물론이고 이 사회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다. 그 사건은 사람의 탈을 쓰고는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되는 충격적이었기에 만인의 공분을 자아냈던 사건이었다. 누구도 감히 피해당사자의 아픔을 헤아릴 수도 없고 고통을 헤아리는 척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서푼어치 주견머리로 너의 고통을 안다고 어쭙잖은 위로의 말을 건네겠다고 나서는 것은 시건방진 태도에 불과하다.

알리는 자신의 상처를 피해 당사자의 고통에 대입시키고 있는데 이는 알리의 개인적인 감정일 수는 있으나 객관적으로도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알리가 자기의 상처를 끄집어내더라도 피해 당사자가 당한 끔찍한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피해 당사자는 물론 이 사회 모두가 진저리를 칠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고 여전히 거기서 헤어나오기 힘들다. 알리가 직관적이지 않은 보조 관념을 선택해서 혼란을 야기한 것은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회가 피해 당사자의 상처를 보듬어 주어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피해 당사자를 관심의 대상에 올리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는게 최선이라는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상태일 뿐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제부터 알리가 온몸으로 직접 체득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어쭙잖은 위로의 말이 값싼 동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과 방송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것을 모면해 보기 위해 피해 당사자를 또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게 한 것이 왜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는지 등에 대해서 절감하게 될 것이다.

알리가 그 노래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다면 자기의 상처부터 먼저 치료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기에게 맺힌 그 응어리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해서조차도 혼란스러워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상태로 타인을 위로하고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모함이고 과욕이다. 알리가 품고 있는 한을 털어내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관조할 여유를 가질 수 없다면 타인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마음도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알리가 이제라도 강박적인 집착으로 생긴 응어리를 풀어내게 된다면 지금의 이 치기가 낳은 본질적인 문제를 직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땐 자기의 상처를 다른 누군가에게 대입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지금의 희화만 있는 것에서 벗어나 풍자와 해학으로 한을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거기에 누군가는 위로를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행동하지 않는 것이 행동하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는데 알리에겐 지금이 그 때가 아닌가 싶다. 일시적으로 방송활동을 중단하는 것이 날개를 꺾을지도 모를 미지의 위험과 맞서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을까? 이제 막 손에 잡히기 시작한 듯한 인기란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Trust your mind"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면서 왜 자기 자신의 음악적 자신감과 신념을 갖고 잠시 환상을 내려놓는 것이 '儉而不陋 華而不侈'였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왜 스스로를 그물에 가두고 온몸을 진흙으로 더럽히는 길을 선택했는지, 그녀의 파들거리는 날개에 얹혀질 무게를 감당할 수나 있을지 참으로 안타깝다.

현재의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당시에 알리의 초심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흔히들 관객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무대에 오르겠다고 상투적으로 얘기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고 소비해주는 한명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왜 다들 그 관객을 방송을 통해서만 찾으려고 할까? 밑천을 다 드러낸 어린 가수의 애처로운 몸짓을 방송으로 보아줄 여유가 있을 것 같지 않기에 환상을 좇은 그녀의 신중하지 못한 선택이 더 마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