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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대물' 성범죄에 대한 여성들의 이중성

   
   
   
드라마 '대물'의 작가와 PD가 모두 교체되었기 때문인지 5회 방송분은 대체적으로 갈팡질팡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무리 상업방송이라지만 그래도 공중파 방송인데 허구를 토대로 한 이런 드라마에까지 정치 세력이 개입해서 이리저리 헤집으려고 한다면 시청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참 답답해진다. 내용도 특기할만한게 없었던 것 같아 지난 방송 중에 나왔던 성추행 에피소드를 언급해보고자 한다.

호스트바에 위장 잠입해 국회의원의 부인을 잡아들였다가 남송지청으로 좌천된 하도야는 남송지청으로 첫 출근을 하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잠깐 졸다가 깬 하도야는 앞자리에 앉은 남자가 그 옆에 앉은 여자의 허벅지를 더듬는 성추행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하도야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데 다른 자리에서 성추행 장면을 카메라로 찍고 있던 서혜림이 다가와 성추행범에게 변태라고 몰아세운다.

성추행범은 내가 언제 그랬냐고 시치미를 떼며 서혜림에게 폭력을 휘두르려고 하는데 그제서야 하도야가 나도 목격자라며 제지하고 나선다.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의식한 성추행범은 서혜림이 하도야를 알아보자 둘이서 사람 병신 만든다며 내가 언제 만졌다고 그러는거냐고 소리치자 성추행 당하던 여자가 만졌다고 거들고 나선다. 하도야는 남의 아가씨 허벅지 허락없이 만지면 성추행이라며 현장범, 성폭력범죄 특례법, 징역, 벌금 등이 어떻느니 주워섬긴다. 열이 뻗친 성추행범이 하도야의 안면에 훅을 날리고 피를 본 하도야는 흥분해서 성추행범과 뒤엉켜 싸운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고 하도야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성추행범을 넘기고 피해자와 증인을 일러주고 증거 동영상을 넘겨준다. 그리고 성추행범에게 나한테 폭력 행사한 거에 대해서는 따로 고소장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런데 그 때 성추행 피해 여성이 '바쁜데 꼭 같이 가야되냐며 그냥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 서혜림이 '그렇게 자꾸 바쁘다 귀찮다 창피하다 피하니까 저런 변태들이 활개를 치는거라며 같이 갈테니까 가자'고 타이른다. 좌천된 곳으로의 첫 출근길에 험한 꼴을 당해 기분을 망친 하도야는 '내 할 일 다했으니까 알아서들 하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검사 하도야의 언행을 보면 참 한심하다. 검사의 신분으로 성추행 현행범인을 목격하고서도 귀찮다는 듯이 눈 감고 회피하는데 호빠 사모님은 잡아들여도 하찮은 성추행범은 검사의 소관이 아니라는 건가. 게다가 검사가 '현장범'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나 '성폭력범죄 특례법 제 11 조 1 항'이라고 주워섬기지 않나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하도야의 이 대사는 좀 심했다. '현장범'은 '현행범인'이라고 해야 되고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11 조에 1 항은 없다.



하도야는 또 성추행범에게 나한테 폭력 행사한 거에 대해서는 따로 고소장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 하도야가 성추행범과 격투하는 장면을 보면 하도야 역시도 폭행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뭐 검사 정도 되니까 그냥 적당히 성추행범을 폭행으로 잡아넣을 수 있으려나.

여기서 문제는 성추행 피해 여성의 이중적인 태도다. 성추행을 당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에도 소극적이었으며 위기를 모면하고 나자 경찰에 가서 진술하려 하기보다는 바쁘다며 그 자리를 회피하려고 했다. 여기서는 서혜림이 찍은 증거 동영상이 있고 상대가 검사니까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만약에 일반인이 성추행 현행범인을 체포한 경우 피해 여성이 쏙 빠져버리고 성추행범이 자기를 체포한 사람을 폭행으로 고소해버리면 성추행 피해 여성을 도와주려던 사람만 곤경에 처한다. 괜히 의협심으로 남의 일에 나섰다가 합의금까지 물어주는 불쾌한 일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11 조(공중 밀집 장소에서의 추행)의 죄는 친고죄에 해당하는데 이처럼 친고죄에 해당하는 성범죄의 경우 피해 여성이 가해자와 합의를 해버려 쏙 빠져버리면 피해 여성을 도와주려던 사람만 엉뚱하게 곤란에 처하는 경우는 실제로도 왕왕 생기는 것 같다. 이런 경우에 피해 여성들은 자기를 도와주어서 위기를 벗어나게 해준 사람이 자기 때문에 곤경에 처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피하기까지 한다. 위기 상황에 처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주려던 사람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꼴만 우스워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성범죄 피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과거에 중국에 공녀로 바쳐졌던 여인들이 돌아오면 환향녀라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이 한편으로는 위기에 처한 여성들을 구해주지 않는다고 타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나섰던 사람이 곤경에 처해도 나몰라라하는 이중적인 태도로는 이러한 인식을 바꾸기 어렵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게 더 나은 것 같다.

예전에 법무부 블로그에서 드라마 '검사 프린세스'에 등장한 사건의 법률적인 판단을 내려 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글의 내용이 부정확함으로써 전체적인 취지가 위험한 글이었다. 글의 내용은 드라마 중에서 성폭행을 당하게 된 여자를 구하려다 성폭행을 하려던 남자 3명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게 되자 대항하여 싸웠는데 쇠파이프를 들어 상해를 입혔기 때문에 방위행위가 상당성의 정도를 넘은 '과잉방위'에 해당되어 무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내용이 불충분했고 글의 전체적인 취지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꼴만 우스워져버리니 위기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더라도 모른 척 지나치는게 낫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다. 조회수가 그리 높지 않은 상태였기에 '기대가능성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댓글로 본문의 내용을 보충하며 글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완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글의 조회수가 10만을 넘기도록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만 하루를 넘기고서 글의 내용이 보완되어 있었다. 영향력이나 신뢰도에서 개인 블로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법무부 블로그에 그런 수준의 글을 올린다는 것은 잘못이다.



상기한 것처럼 여성들이 성범죄에 이중적으로 대처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법무부 블로그 글의 최초의 취지와 마찬가지로 성범죄 현장을 목격하더라도 내 일이 아니라고 그 자리를 피해버리고 도와주러 나서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신체 구조상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성범죄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줄어들지 않는다.

성범죄 피해자들 중에는 친고죄를 '바쁘다 귀찮다 창피하다'며 피하려는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인식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친고죄가 일견 방패막이 같지만 실제로 보면 성범죄 피해자에게 고소를 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것으로 악용당할 수도 있다. 성범죄로 피해를 당하고 고소를 막으려는 가해자로부터 집요한 협박을 당하는 이중의 피해를 초래하는 것이 친고죄다. '성폭력은 개인 아닌 사회문제'라는 인식을 넓혀가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형법상 친고죄를 폐지하는 것이고 그래야 성범죄에 대처하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유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국회에서 친고죄 폐지가 계속 통과되지 않고 보류되고 있는데 더 망설일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덧1) 성추행하는 장면에서 신문에 있는 '좋은 생각'이란 문구가 이채롭다.
덧2) 간단하게 가볍게 쓰려던 것이었는데 쓰다보니 좀 거창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