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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김탁구' 대본의 마지막 장면 삭제는 잘한 선택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는 숨겨진 결말이 더 있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 어린 여자 아이가 개다리춤을 추며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푸 없이는 못 마십니다"를 익살스럽게 부르고, 구마준(주원)이 "꼬마야, 아빠 이름이 뭐야?"라고 물으면 "김탁구인데요? 탁구를 잘해서 김탁구가 아니고, 높을 탁 구할 구 자를 써서 김탁구인데요?"라고 답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편집 과정에서 잘려 나가 공개되지 못한 장면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해당 장면을 공개하라는 의견들도 많이 보인다. 그러나 편집 과정에서 대본의 마지막 장면을 삭제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되고 향후라도 해당 장면은 공개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것이라 본다. 이 장면은 불필요한 옥상옥이 될 수도 있겠고 어쩌면 드라마 전체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엔딩은 극중에 나오는 "그리고 우리들의 날들은 또 다시 계속됐다"는 김탁구의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주제가 너무나도 명확하다. 엄청난 일을 겪었지만 등장인물들은 오리는 물로 가고 꿩은 산으로 가듯이 언제나처럼 제 갈 길을 택하여 살아가고 있다. 50일여 만에 다시 문을 열게 된 팔봉제빵집 식구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활기차게 아침을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팔봉제빵집으로 신문이 배달되는 모습이 나온 것을 두고 서인숙의 자살을 암시한다고 해석하는 의견들이다. 반드시 서인숙이 죽어야 해피엔딩이 된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서인숙의 경우는 남편은 물론 자식들에게서도 버림받고 껍데기 뿐인 텅 빈 거성가에 홀로 남아서 "그래, 다 필요없어. 나 서인숙이야. 거성의 안주인 서인숙이라구. 알아?"라고 공허하게 외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서인숙에게는 충분히 비참한 결말이다.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또 한가지는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한승재가 감옥으로 간 것은 과거에 저질렀던 악행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거성의 자금을 횡령해 왔던 이중장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한승재는 감옥으로 갔고 서인숙은 껍데기만 지키고 있으니까 인과응보가 아닌가 생각하기 쉽고 또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해버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정리한 두 사람의 결말은 넓은 의미의 인과응보라고는 할 수 있으나 좁은 의미의 인과응보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팔봉제빵집으로 신문이 배달되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장면은 언제나처럼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일상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어김없이 새 날은 시작되고 반복된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봐야 한다. 드라마에서 깨어 나 현실속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다소 비약적인 해석을 해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꼭 누군가 죽어야 해피엔딩이라고 보는 것은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현실을 외면하고 니힐리즘이나 현실도피로 이어질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것은 권선징악을 내용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한데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팔봉제빵집 대장 양인목은 다시 예전처럼 호통을 치고 팔봉집 식구들도 그에 맞추어 제빵일을 시작한다. 김탁구가 거성의 대표직을 수행할 때 비서로 있었던 차준현이 김탁구를 따라 제빵의 길을 가겠다고 팔봉제빵집 식구가 되었다는 것만 다를 뿐 예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전에 엄청난 일들을 겪었고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건 그 때의 태양이었고 오늘의 태양이 뜨면 또 다시 오늘의 일상을 반복하면서 겪어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전에 팔봉이 사망했을 때 팔봉제빵집 식구들이 슬픔에 젖어 있자 김탁구는 제빵실로 가 팔봉이 남기고 간 경합과제를 제빵실에 걸고 신유경이 선물한 모자를 쓰고 미소를 지으며 활기차게 빵을 만들기 시작한다. 김탁구가 만든 빵은 팔봉이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김탁구가 보는 앞에서 직접 시연해 주었던 봉빵이었다. 김탁구는 팔봉집 식구들을 불러 빵을 내놓으며 아침 식사를 하라고 한다. 비록 김탁구의 실력이 팔봉 만큼은 아니었다 해도 그 빵을 먹은 팔봉식구들은 슬픔에서 벗어나 또 다시 일상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게 바로 김탁구가 지닌 긍정적인 에너지의 효과를 설명하는 장면인 거다.

팔봉이 말한 '어차피 인생이란 겪는 것'이란 것도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좀 잘됐다고 또는 오늘 좀 잘못됐다고 그걸로 인생 끝나는 거 아니니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결국 다 지나가는 거니까, 살아야 하니까, 살아 있는 동안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으니까,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고 겪어내야 된다는 것이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낫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사소해 보이지만 다들 이런 희망이 있기에 사람들이 살아낼 수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탁구는 제빵을 시작하기 전에 제빵실에 걸어 둔 팔봉의 경합 과제를 쳐다보면서 "네 알겠습니다. 스승님"이라 말하고 소위 빵춤을 춘다. 그리고는 "자 그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을 한 번 만들어볼까?"라고 말하면서 드라마는 끝이 난다. 김탁구가 행복한 빵을 만든다는 것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들어야 할 빵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김탁구는 엄청난 일을 겪었지만 이미 모두 다 지나갔고 이젠 이렇게 앞으로 다가 올 또 다른 날들을 겪어 낼 준비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김탁구의 딸이 개다리춤을 추며 故 서영춘님의 유행어를 부르고 있는다는 장면을 삽입한다는 것은 옥상옥(屋上屋)이 될 것 같다. 이런 장면을 제작했다면 아마도 김탁구가 열두 살이었을 때의 반복임을 상징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 그동안 김탁구와 구마준은 전혀 왕래가 없었다는 얘기가 되는건데 급작스럽기는 했으나 그래도 대 화해의 결말을 내놓았던 것과 비교하면 생뚱스럽도록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