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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 김탁구' 가장 불쌍한 인간 한승재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 한승재는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고 있는 악역으로 그려지고 있어 마치 악의 화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한승재야말로 가장 불쌍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한승재와 같은 인물이 실제 현실에도 존재할런지에 대해서는 선뜻 상상하기 어려운데 한승재를 단순히 악의 화신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한승재가 처한 상황이 참으로 고단하고 서글퍼 보인다.

한승재는 부모가 없는 고아였고 구일중과 친구였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홍여사가 한승재를 거두어 보살펴 줌으로써 구일중과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자랐다. 한승재는 서인숙을 사랑하고 있었으나 홍여사가 서인숙을 구일중의 짝으로 받아 들이게 되자 한승재는 사랑하던 여자를 포기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친구인 구일중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나 홍여사와 구일중은 부모 없이 오갈 데 없는 자기를 거두어 준 은인이었기에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은인인 홍여사와 구일중의 수족 노릇을 하면서 사랑하는 여자인 서인숙을 평생 바라보기만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서인숙은 결혼한 지 7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홍여사로부터 구박을 받게 되고 사랑 없이 서인숙과 결혼을 했던 구일중은 한번도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서인숙은 아들을 낳는 비법을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 갔다가 '다른 놈의 씨가 아니라면 절대 아들은 없다'는 말을 듣고 낙심하여 집에 돌아 온다. 그런데 김미순이 구일중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여자한테서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떠올리며 분노하고 절망하여 괴로워하게 된다.



서인숙은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 온 한승재를 보면서 '다른 여자한테서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떠올리며 아들을 낳아 홍여사와 구일중에게 인정받아 보겠다는 욕심으로 한승재를 유혹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인 서인숙이 괴로워하는 것을 본 한승재는 차마 서인숙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결국 한승재는 은인이자 친구인 구일중의 처와 불륜을 저지르게 되고 서인숙은 거짓말처럼 임신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승재에게는 진짜 불행한 비극의 시발점이 되고 만다.

서인숙은 한승재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리며 '당신하고 내가 우리 아이한테 거성가를 물려주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김미순을 찾아 내 뱃속에 아이를 없애 버리고 두 번 다시 얼씬도 못하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한편 홍여사와 구일중도 한승재에게 김미순을 찾아 무사히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는데 한승재는 결국 평생에 은인이라고 여기고 존경해 왔던 홍여사와 구일중에게 사람들을 더 풀어서 찾아보겠다고 속이고 김미순을 찾아내 없애 버리려고 한다.

한승재는 출산의 진통이 시작된 김미순을 발견하지만 살려달라는 김미순의 애원의 손길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병원으로 데려간다. 아이만 넘겨 받아 없앨 계획이었으나 핏덩이를 안고 어떻게든 살아볼라고 애원하는 김미순을 차마 어쩌지 못한 한승재는 김미순에게 두 번 다시 거성가에 나타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평생 숨어 살겠다고 약속하라며 만약에 이를 어기고 눈에 띄면 둘 다 죽을 거라고 협박하고는 아이를 안은 김미순을 놓아 준다.



그렇게 정리된 줄로만 알았던 이들의 인연은 성장한 김탁구가 거성식품 청산 공장에서 구일중과 우연히 조우하게 됨으로써 또 다시 얽히게 되고 만다. 한승재는 구마준에게 거성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김탁구의 존재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김탁구를 없애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기 시작한다. 한승재가 온갖 저열한 수단방법을 동원하는 이유가 부정(不貞)하게 얻은 자식에 대한 부정(父情)이라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승재의 행위를 부정(父情)이란 말로 정당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한승재는 아들인 구마준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지만 한번도 구마준을 아들이라 불러보지 못하고 구마준 역시도 사사건건 한승재를 무시하며 아저씨라고 부른다. 구마준은 이젠 한승재를 철저하게 짓밟아 버리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있다. 구마준은 어릴 때부터 출생의 비밀을 알고 그 상처를 간직하면서 살아 왔기에 한승재가 자기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라고 치부해 버린 것이다.

한승재는 사랑하는 서인숙이 괴로워하는 것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부정을 저지르게 되었고, 평생의 은인이었던 홍여사의 믿음을 배신하고 끝내 죽음으로 내몰았고, 친구인 구일중마저도 속여가며 서인숙과 구마준을 지키기 위해 악역을 마다않고 애써 왔다. 그랬음에도 구마준은 늘 한승재를 무시하고 조롱하며 큰소리를 쳤고 서인숙은 항상 구일중의 사랑에 목말라하며 구일중만 바라보고 있다. 서인숙의 요청대로 한승재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구일중을 죽여 없애려고 했더니 서인숙은 되려 한승재의 따귀를 때리고 어떻게 감히 구일중한테 손을 대느냐며 당장 가서 찾아 내지 않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겁박하기까지 한다.



구마준은 그토록 반대하는 신유경과의 혼인을 강행하고 한승재에게 굳이 올라고 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참석하지 않는 게 도와주는 것일 수도 있다고 비아냥거리며 말하지만 한승재는 구마준이 결혼하는 성당에 찾아 온다. 아들의 결혼식에서조차도 차마 아비임을 드러내고 아들의 결혼을 마음 놓고 축하해줄 수도 없는 한승재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성당을 빠져 나온다. 이 때에 한승재의 표정은 한승재가 처한 처지가 얼마나 불행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신유경과 결혼을 한 구마준은 한승재와 서인숙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시각각으로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서인숙이 한승재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게 되면서 결국엔 구일중에게마저 홍여사의 죽음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었다. 이제 더는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한승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알 수 없다. 홍여사를 빗속에 방치했던 때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지 아니면 구마준의 출생에 대한 비밀만은 지켜서라도 구마준을 살려내기 위해 모든 것을 혼자서 떠안고 가게 될 지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한승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한승재에겐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일 뿐이다.

아마도 한승재에게 가장 불행하고 가혹한 경우는 한승재와 서인숙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비밀을 다른 이도 아닌 아들인 구마준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이다. 홍여사가 빗속에 방치되었던 날 밤에 벌어졌던 일들을 구마준이 모두 보고 들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구마준이 어릴 때부터 출생의 비밀을 알고 괴로워하면서 성장해 왔다는 사실을, 겨우 열두 살짜리 아이가 그 엄청난 비밀을 알고도 감쪽같이 속이고 혼자 간직한 채 살아냈다는 사실을 한승재가 알게 된다면 한승재의 기분은 정말로 참담하고 끔찍할 것이다. 구마준을 지키기 위해 구일중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구일중의 지분을 훔치는 비열한 짓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한승재에게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고 한승재는 그 사실이 몸서리쳐지도록 괴로울 것이다.



같이 못할 여자인 서인숙을 평생 바라보기만 하면서 살아왔고 서인숙이 원하는 일이라면 평생의 은인이라 여기며 충성해 왔던 홍여사와 구일중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면서까지 어떤 오물을 뒤집어 쓰고 어떤 오명을 쓰더라도 마다 않고 기꺼이 해 왔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한 불행이 어딨겠나 싶을 정도지만 그 서인숙은 단 한번도 한승재를 바라봐주지 않고 오로지 구일중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아들인 구마준마저도 한승재를 무시하고 이젠 아비인 한승재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행한 것은 그렇게 지켜내려고 했던 아들이 자기의 부정한 과거를 진작부터 알고 괴로워하면서 성장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 한승재야말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승재가 저지른 악행들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한승재의 행위를 부정(父情)이란 말로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기엔 한승재가 저지른 악행들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이고 그 죄질이 상당히 나쁘고 무겁다. 핏덩이를 안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김미순을 차마 해코지하지 못했던 한승재가 자기 아들인 구마준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악행을 저질렀다는 드라마의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은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딜레마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시청자에게 던지고 있다고 봐야 할까?

서인숙의 입을 통해서 몇 번이나 구마준은 한승재가 아닌 구일중의 아들이라는 말을 흘렸는데 만에 하나 구마준이 진짜 구일중의 핏줄이라면, 드라마가 이제 겨우 2회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극단적인 전개는 없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만약에라도 구마준이 한승재의 핏줄이 아니라면 이것이 가장 비극적인 상황이다. 구마준과 한승재 뿐만 아니라 거성가의 모든 사람에게 가장 불행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