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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드라마투르기

'김탁구' 봉빵은 시베리아 귤 까먹는 소리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봉빵에 얽힌 사연이 드디어 다 밝혀졌다. 그동안 드라마 제작진이 그렇게도 켜켜이 장막을 쳐왔던 것을 생각하면 봉빵에 얽힌 사연이 겨우 이 정도라는게 허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젠 봉빵을 재현하는 것으로 스토리를 이어가려는 모양이다. 봉빵을 재현하는 이유라는 것도 고작 팔봉의 제빵명장 타이틀을 지켜내기 위해서다. 궁극적으로는 팔봉의 명성을 지켜야한다는 당위성이 이유겠지만 팔봉이 7년여간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찾아 낸 발효점을 제빵에 관한한 완전초보에 후각까지 온전하지 못한 김탁구에 의지해서 단 며칠만에 재현한다는 시나리오다. 시연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의식을 회복하는 팔봉이 어떤 변수역할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드라마가 갑자기 삼류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당혹스럽고 황망하다.

먼저 봉빵에 얽힌 사연을 기록해보면 다음과 같다.

팔봉과 춘배는 어린시절부터 죽마지우이자 라이벌이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과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빵' 만들기 내기를 즐겨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한국사람 체질에 잘 맞는 빵을 개발하기로 의기투합을 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빵이 주종빵이다. 팔봉은 주종빵을 오래전부터 연구해오고 있었으나 그 발효점을 찾지 못해 영 진전이 없었는데 춘배가 그 발효점을 찾아내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춘배에겐 탁구와 마찬가지로 남들에겐 없는 천재적인 후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팔봉과 춘배의 합작으로 탄생한 봉빵이 성공하면서 두 사람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그 명성과 함께 엄청난 돈을 벌기 시작했으나 결국 그게 화근이 되버렸다. 팔봉이 주종빵을 만든 이유는 이스트를 최소화하고 발효시간을 오래함으로써 풍미와 소화력을 돕는 좋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춘배가 발효시간을 그렇게 오래 가지면 팔리는 물량을 맞추지 못한다며 레시피대로 빵을 만들지 않고 원칙을 어겼다. 춘배는 팔봉에게 돈이라는게 본시 때가 있어가지고 벌릴 때 벌어들여야한다며 어차피 일반사람들 맛에는 그냥 그 빵이 그 빵 아니냐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헤어지게 된 사건이 발생한다. 춘배가 상하지 않게 오래가게 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합성보존료를 섞어야 된다며 봉빵에 합성보존료를 섞어서 만들었다. 팔봉은 화학첨가물을 집어넣은 빵을 내다 팔 수는 없다며 춘배가 만들어놓은 빵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린다. 춘배는 팔봉이 버린 빵을 주워들고 이 빵은 팔봉만의 빵이 아니라 자신의 빵이기도 하다고 항변한다. 팔봉은 춘배에게 반성할 기미가 전혀 안보인다며 더 이상 뜻을 같이 할 수 없으니까 제빵실에서 나가라고 내쫓는다.

그렇게 갈라서게 된 두 사람은 결국 각각의 봉빵을 만들기 시작했고 결과는 춘배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팔봉은 사람에게 좋은 주종빵을 고집했으나 춘배는 돈을 좇는 빵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빵에 합성보존료를 섞어넣은 것이 손님들한테 알려지면서 춘배의 가게는 쫄딱 망하고 춘배도 그 뒤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랬던 춘배가 갑자기 나타나서 팔봉의 발효일지는 본디 자신의 것이었으나 팔봉이 훔쳐다가 제빵명장의 명성을 얻었다며 팔봉의 명성을 깨뜨리겠다고 한다.

이것이 봉빵의 모든 것이다. 애초에 팔봉이 봉빵을 만들지 않는 이유에서부터 시작했던 것에 비하면 밝혀진 사연은 상당히 뜬금없어 보인다. 드라마 속의 대사를 인용해서 표현하자면 '무슨 시베리아 귤 까먹는 소리'라 하겠다. 춘배와 결별하고서도 계속해서 봉빵을 만들었다면 굳이 발효점을 찾아내는 춘배의 도움은 필요없었다는 얘기일텐데 팔봉이 더 이상 봉빵을 만들지 않는 이유가 불분명하다. 춘배와 결별하고 열심히 경쟁하다가 춘배가 망하고 자취를 감추자 문득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라도 했었다는 것인지 김탁구처럼 뛰어난 후각을 가진 수하생에게 발효일지를 물려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보아하니 춘배의 레시피와 팔봉의 레시피는 어딘가 다른 점이 있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결국은 팔봉의 제빵명장 타이틀은 지켜질 것으로 보인다. 춘배의 경우는 팔봉에게 가진 오해를 풀고 팔봉의 옆에서 예전처럼 형님 동생하며 김탁구의 조력자로 남게 될 것인지, 시연에서도 팔봉의 명성을 깨뜨리지 못한 것마저도 앙심을 품고 구마준과 결탁해 계속해서 경쟁을 하게 될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팔봉과 김탁구 대 춘배와 구마준의 극단적인 선악의 대결구도로 끌고 갈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가 통속극임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극단적인 선악대결구도를 형성할거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도 같다.

구마준은 춘배가 준 레시피대로 봉빵을 만드는데는 성공했으나 경합에서는 탈락하게 되고 춘배를 찾아가 따진다. 그러나 춘배는 그 방법을 쓸지 말지의 선택은 마준의 몫이라고 분명히 말했다며 원래 욕심 많으면 유혹에도 약한 법이라고 비웃는다. 그리고 팔봉이 봉빵의 발효일지를 훔쳐다가 지금의 그 명성을 얻었다며 발효일지를 가져오면 팔봉의 명장 타이틀을 깨부술 수 있으니 마준의 2년 노력을 수포로 만든 팔봉에게 같이 복수하고 싶지 않냐며 또 다시 유혹의 손길을 내민다. 구마준과 춘배가 만나는 장면은 늘 위 이미지처럼 어둡고 연기 자욱한 음습한 곳인데 이러한 장면을 통해 구마준과 춘배는 악이라는 것을 상징하려는듯하고 위에 언급한 선악구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보게 하는 장면이다.

팔봉제빵집으로 돌아 온 구마준은 팔봉을 찾아가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한다. 하지만 팔봉은 친구를 해하려는 것도 모자라서 선생인 나까지 속이려 했음에도 후회하고 반성하는 기미가 안보이니 인정할 수가 없다고 한다. 또한 인정서를 받고 싶다면 다시 2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고 그 2년은 지난 2년보다 훨씬 더 감내할 것이 많아질거라고 한다.

돌아나오던 구마준은 구일중과 김탁구가 만나는 장면까지 목격하게 되면서 결국은 춘배가 내민 유혹의 손길을 잡게 된다. 2차 경합에서 김탁구와 함께 막걸리 발효종을 시험하던 독을 깨뜨리고 휴지통에 불을 지른다. 그리고 불이 나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팔봉의 방에 몰래 들어가 팔봉의 발효일지를 들고 집을 나선다. 구마준이 발효일지를 잡으려는 순간 팔봉이 부르는 환청이 들리고 문을 나서려는 순간 팔봉제빵집 식구들이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와 모습이 보이지만 모두 환청이고 환영들이다. 이따가 반죽시합을 하자는 김탁구의 환영을 마지막으로 보게 되지만 구마준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길을 택한다.



제빵실 식구들은 구마준이 제빵실에 불을 내고 야반도주했다는 것과 김탁구에게 설빙초를 먹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까지 알고 어이없어한다. 그런데 이 때 봉빵이 실은 팔봉의 작품이 아니라 본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춘배가 나타났으며 진실규명결과 진정서 내용이 사실이라는게 밝혀지게 되면 팔봉선생님 명장타이틀은 박탈당하게 될 거라는 말을 전하러 온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제빵협회 기술고문들이 심사하는 가운데 봉빵에 대한 재심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인데 그 자리에서 진정인과 함께 팔봉이 직접 봉빵 시연을 해줘야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정서에 이의제기는 일주일내에 해야 된다고 한다.

결국 팔봉이 쓰러지게 되고 양인목은 팔봉의 건강상태마저 좋지 않자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김탁구가 대리인 자격으로 진정서에 이의제기를 하고 돌아와 제빵실 식구들에게 봉빵을 재현해내면 되는거 아니냐고 주장한다. 양인목, 허갑수, 양미순 모두 봉빵을 먹어 본 사람들이고 서태조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거 없다는 것이다. 양인목은 팔봉이 발효점을 못찾아서 7년이나 연구해서 탄생한게 봉빵인데 발효일지마저 구마준이 훔쳐간데다 봉빵을 만들 때와는 기후와 외부요건 모두 달라져 있으니 일주일 안에 발효점을 찾고 일정한 맛의 빵을 유지할수 있는 발효종을 찾는다는 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탁구는 혼자라도 하겠다고 우기고 제빵실 식구들도 하나둘씩 김탁구를 따르게 된다.

결국 양인목도 봉빵을 재현하는데 동참하게 되는데 모두 다 오로지 김탁구의 후각에만 목을 매고 있는듯하다. 김탁구는 여전히 후각이 돌아오지 않아 답답한데 제빵실에서 잠든 사이에 꿈결에 팔봉이 나타나 '니 자신을 조금 더 믿거라. 냄새를 맡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은 절대로 후각은 돌아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냄새를 못 맡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버리거라. 그 두려움을 버린다면 모든게 괜찮아질거다'라고 말해준다.



꿈에서 깨어 난 김탁구는 제빵실에 발효종을 담가 둔 독을 향해 다가가면서 발효가 일어나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소리가 들린다. 냄새가 들린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냄새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고 말을 한다. 21회 방송에서는 촉각을 일깨우는 장면이 나왔기에 나는 어제의 글에서 오감을 언급했었는데 글을 쓰면서도 드라마에 유독 청각이 나오지 않는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랬더니 22회 방송에서 드디어 청각이 등장했다. 이로써 김탁구는 후각, 청각, 시각, 촉각 네 가지를 단 며칠만에 스스로 체득하게 되었는데 뛰어난 미각을 가진 양미순의 도움을 염두에 두었기에 미각을 일깨우는 장면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남귤북지(南橘北枳)라고 환경이나 처지가 바뀌면 거기에 적응해 나갈 수 밖에 없는게 사람이고 팔봉의 말대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고 지성감천(至誠感天)이며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니 노력을 하다보면 못할 것도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김탁구가 며칠만에 촉각이 달인의 경지에 도달하고 팔봉이 7년여만에 찾아낸 발효점을 단 며칠만에 청각에 의지해 찾아낸다는 것은 너무 과도한 것 같다. 남귤북지를 쓰고 보니 드라마에서 이 봉빵이라는게 남귤북지가 뜻하는 바와는 달리 말 그대로 맛좋았던 귤이 어느 선을 넘어서면서 별 맛 없는 탱자가 되버린 것 같이 느껴진다. 드라마에서 아무리 봉빵을 재현해낸다고 하더라도 이미 봉빵은 시베리아 귤 까먹는 소리가 되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