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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김탁구' 치망순역지 vs 순망치한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작가가 드라마에 정체불명의 설빙초라는 이름의 독초를 등장시켰던 데에는 별다른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탁구가 마신 설빙초액의 양이 적으므로 미각과 후각이 마비된 불편함을 일정한 기간동안 견디면 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는데 단순히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을수도 있겠다. 설빙초액이 새롭게 등장한 인물인 춘배(최일화) 그리고 봉빵과 관련이 있다면 아마도 범법행위와 도덕성을 놓고 팔봉선생과 춘배 사이에 의견충돌이 있었고 그로 인해 둘 사이에 생긴 오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별했었던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설빙초액 사건과 구일중의 의도된 교통사고는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무리수였던게 확실해보이고 이런 자극적인 설정을 등장시켰다는 것은 드라마 제작진들이 통속극의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통속극에나 어울릴만한 소재를 다루고는 있으나 일반적인 통속극보다는 한단계 발전된 드라마가 될 수도 있을거라는 기대는 이쯤에서 접어야 될 것 같다. 이러한 제작진들의 무리수로 인해 드라마의 재미는 향상되었으나 그만큼 드라마의 격은 추락했다고 할 것이다.



김탁구가 설빙초액을 마시는 것을 제지하지 못한 구마준은 '이건 내 뜻이 아니라 김탁구의 운명이라'고 말하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김탁구가 설빙초액을 마시려는 것을 제지하려고 했던 구마준은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오로지 김탁구를 이겨야만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이란게 그리 쉽게 변하지는 않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구마준을 어디까지 추락시키고 악역으로 끌고 갈 생각인지 알 수는 없겠으나 이젠 한국의 드라마들도 명백한 선악의 구도를 만들어야 시청률이 높아진다는 고질적인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탁구는 열이 내리고 정신을 차리게 되는데 설빙초액을 마셔서 열이 내린건 아니겠지만 마치 설빙초액이 해열제로 작용한듯한 인상을 준 것은 상당한 실수다. 이 장면을 염두에 두고 설빙초라는 허구의 이름을 등장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빙초액은 잘못 사용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수도 있음을 간과했다. 아마도 작가가 설빙초라는 허구의 이름을 사용한 의도도 이러한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거라는 추정을 했었기에 설빙초액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을 꺼려했었는데 조금은 허탈한 생각도 든다.

양미순이 끓여주는 죽을 먹던 김탁구는 미각과 후각이 마비되었음을 알고 병원에 가보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지는 않는다. 김탁구는 팔봉제빵집 식구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걱정하게 될까봐 양미순에게 감기 때문에 고열이 나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된거라며 숨기게 된다. 그러나 양미순은 제빵실에서 구마준과 김탁구가 하는 얘기를 듣게 되고 김탁구에게 먹였던게 사실은 감기약이 아니라 김탁구의 미각과 후각을 마비시키는 약이었으며 김탁구의 미각과 후각이 마비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양미순은 감기약만 안먹였어도 김탁구가 미각과 후각이 마비되지는 않았을거라는 미안함에 어쩔줄 몰라하게 되고 결국은 김탁구가 다 나을때까지 김탁구의 미각과 후각을 대신해주겠다고 한다. 김탁구 앞에 밀가루 반죽을 내놓으며 지난 2년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해왔는데 그렇게 열심히 연습해왔던걸 손이 기억할거라며 김탁구를 위로한다. 마비된 미각과 후각으로 인해 힘들어하던 김탁구는 양미순의 말을 듣고 다시 의욕을 불태우며 연습을 시작한다.

연습에 몰두하며 '손이 즐거워지고 눈이 재밌어진다'는 김탁구의 독백은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장면에서는 예전에 김탁구가 제빵실 가스 누출로 인한 폭발사고로 실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눈을 가린 채 마지막으로 밀가루 반죽을 하던 때가 연상된다. 제빵실 식구들의 격려로 빵을 만들기 시작하자 밖에 서 있던 팔봉선생이 제빵실을 올려다보며 '탁구야, 오늘을 꼭 기억해다오'라고 말했었다. 그게 결국은 이런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팔봉선생이 느닷없이 예언자로 바뀌어버린 것 같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있던 것이 없어져서 불편하더라도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참고 살아갈 수도 있다. 미각과 후각이 마비되었다고 하더라도 손의 촉각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니 그 촉각을 일깨워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발상은 좋았으나 촉각만으로 밀가루 반죽을 시작한지 단 5일도 안되어서 손이 즐거워지고 눈이 재밌어질 정도의 경지까지 간다는 것은 과도한 설정이었다고 하겠다.

한편 춘배는 去者必返(거자필반)이라 쓴 종이에 싼 돌멩이를 팔봉제빵집에 던지고 가는데 이를 구마준이 목격하게 된다. 유리창이 깨지면서 팔봉제빵집 안으로 들어온 돌멩이를 본 양인목은 누군가 그냥 저지른 장난같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팔봉선생에게 보여주며 춘배어르신이 다시 돌아온건 아니냐고 물어본다. 팔봉선생은 조용히 하라고 얘기하고는 발효일지를 들추는데 봉빵은 팔봉선생만의 작품이 아니라 팔봉선생과 춘배의 공동작품이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춘배는 자신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팔봉선생에게 알려주기 위해 거자필반이라 쓴 쪽지를 전했던 것 같은데 춘배가 사용하기에 적절한 용어는 아닌 것이라 생각된다. 거자필반이란 불교적 윤회관을 잘 나타내는 말로서 만해의 '님의 침묵'에 나오는 구절과 연관되어 더 유명해졌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란 덧없는 일이니 너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지나치게 증오하거나 미워하는 것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증오에 가득찬 춘배가 그냥 단순히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로 거자필반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구마준은 김탁구의 미각과 후각이 마비되자 홀로 경합준비에 매진하는데 김탁구와는 달리 천부적인 후각능력을 갖지 못해 생각처럼 진척이 없고 그 원인을 알 수 없기에 답답하다. 이 때 춘배가 등장해서 봉빵을 만든 사람이라며 봉빵을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건네며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고 한다. 춘배는 김탁구와 마주쳤을 때는 황망히 사라졌던 것과는 달리 구마준과 마주쳤을 때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더 나아가 일부러 구마준을 찾아와 부탁까지 하고 있다. 이것은 '흑심(黑心)을 가진 사람은 흑심(黑心)을 가진 사람을 알아본다'고 해야 될래나.

구마준은 2차 경합에서 춘배의 레시피대로 봉빵을 만드는데 성공은 했지만 경합에서는 탈락하게 된다. 팔봉선생은 구마준이 만든 빵을 맛보고 춘배의 레시피라는 것을 감지하고 구마준에게 '너만의 레시피로 만들었느냐'고 물어보지만 구마준은 춘배의 레시피대로 했다는 사실을 숨겼다. 한편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 케잌을 완성한 양미순과 다양한 발효종으로 실패한 빵을 만든 김탁구는 경합에 통과했다. 앞으로 팔봉선생은 구마준에게 어떤 교편을 휘두를지 궁금하다.



설빙초액 사건에 굳이 의미를 부여해보자면 김탁구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라면 구마준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하겠다. 결국 김탁구는 구마준이 없어도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즉 오감을 일깨워서 제빵을 계속할 수 있겠으나 구마준의 경우는 김탁구의 후각이 마비되자 배합이 잘못된건지 발효점이 잘못된건지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헤맬것이다. 구마준으로서는 김탁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깨닫는게 중요할 것 같다.

그리고 거자필반이란 쪽지와 함께 등장한 춘배를 보면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주제가 해원(解寃), 상생(相生), 보은(報恩)으로 모아지는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서로에게 쌓인 오해와 한을 풀고 받았던 은혜에 보답하고 서로가 잘 되게 도와주는 대충 이런 결말이 예상된다.

마지막으로 김탁구의 촉각을 일깨우는 장면을 보니 문득 3차 경합의 주제가 떠오른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을 총동원해서 만들어야 되는 빵이라면 3차 경합의 주제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빵" 정도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