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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 설빙초는 구마준의 진심 아닐까?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19, 20회는 상당히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를 등장시켰다. 한승재가 구일중을 사고사로 위장해 제거하려고 했고 구마준은 김탁구의 후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독초인 설빙초액을 구입했다. 사고를 당한 구일중은 구일중이 운전하는 차를 몰래 뒤따라가던 김미순의 측근인 닥터윤에 의해 구조가 되었으나 김탁구는 구마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상황에서 설빙초액을 삼켜버렸다. 김탁구는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자칫하면 천부적인 후각이 마비되고 제빵명인이 되는데 큰 장애가 될 수도 있게 되었다.

물론 드라마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김탁구의 후각이 영영 복구되지 못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김탁구의 경우는 양미순처럼 탁월한 미각을 가진 것도 아니고 구마준처럼 뛰어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후각을 상실하게 된다면 제빵인으로서 성장하기는 힘들다고 봐야 된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나는 김탁구가 설빙초액을 삼켰으나 해독하는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전 글을 통해서 언급했었다. 이런 추정을 해 본 이유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드라마속에 나오는 설빙초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에서 설빙초가 처음 언급되었던 19회 방송을 본 후에는 그것이 무엇인가 궁금했기에 포털에서 검색을 해 봤지만 그와 관련한 검색결과가 아예 없었다. 결국 나는 이 설빙초라는건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설빙초에 해당하는 독초가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지만 설빙초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추적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주 우연히 무언가를 읽고 있다가 "어? 이게 설빙초네?"라고 할만한 내용이 눈에 띄었고 바로 인터넷을 열고 검색을 했더니 신기하게 맞았다. 이건 뭐 내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한게 아니니 "Eureka"라고 할 수는 없고 별로 상관없는 곳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으니 역시 Geoffrey Chaucer의 "Omnes viae Romam ducunt"라고 하는게 더 낫겠다.

각설하고, 드라마에 등장하는 설빙초 사건을 보면 설빙초는 마치 구마준의 진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고 "자, 이제 너는 어찌 할테냐? 너의 진심은 과연 무엇이냐?"고 끝없이 구마준에게 묻고 시험해보는 것처럼 보인다.



구마준의 내면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자괴감의 원인은 겁쟁이라는데 있다. 구마준은 자신의 친부가 구일중이 아니라 사실은 한승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서인숙과 한승재가 조모인 홍여사를 빗속에 방치해 사망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겁쟁이인 구마준은 그것을 나서서 바로잡을 배짱이 없다. 결국 구마준은 이 엄청난 비밀들을 안으로 꽁꽁 숨겨두고 살아내느라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다. 김탁구와 함께 가출을 해 청산에 들렀던 구마준은 신유경이 그 부친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신유경의 도움을 청하는 신호를 보지만 겁쟁이인 구마준은 슬그머니 도망쳐버리고 만다.

팔봉제빵집의 1차 경합이 진행되던 때 김탁구와 구마준은 서로 손목에 끈을 묶고 생활을 하게 되는데 시장통에 들렀다가 김탁구가 김미순을 찾아 헤맬 때 만났던 깡패들을 만나 쫓기게 된다. 둘은 그렇게 쫓기다가 막다른 곳에 다다르게 되었고 김탁구는 경합포기의 의사표시와 마찬가지인 자기 손목의 끈을 스스로 풀며 구마준을 나서지 말고 피하라고 한다.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폭행당하는 김탁구를 바라보면서도 겁쟁이인 구마준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구마준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겁쟁이'이고 구마준은 유독 겁쟁이란 말을 들으면 과민반응을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구마준에게 겁쟁이라고 두 번이나 말한 것은 신유경이다. 구마준이 어릴 적 청산에 갔을 때 만난 신유경이 '너 겁쟁이구나'라고 말을 했었고 신유경이 서인숙이 용서가 안된다고 찾아와 함께 복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김탁구 만날까봐 겁내고 후회할까봐 겁내고'라고 신유경이 말했었다.

신유경을 집으로 들여보내고 팔봉제빵집으로 돌아 온 구마준은 설빙초액이 든 병을 들고 "겁을 낸다고? 내가?"라며 결의를 다진다. 그런데 막상 김탁구의 음용수병에 설빙초액을 투입하려는 순간엔 망설이게 되고 그 때 조진구가 나타남으로써 미수에 그치고 만다. 찾고 있던 카세트를 김탁구가 새로 사다놓은 사연을 양미순으로부터 듣고 구마준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고 설빙초액이 든 병을 책상서랍에 던져 넣음으로써 설빙초액을 사용하겠다는 범의를 포기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구마준이 의도하지 않은 의외의 상황이 벌어져 김탁구가 설빙초액을 삼키려고 하는데 이를 안 구마준은 "안 돼"라고 소리치며 다급하게 안채로 달려오지만 간발의 차이로 김탁구가 설빙초액을 삼키는 것을 지켜보게 되고 주저앉아버린다. 그럼 구마준은 설빙초액과 같은 것으로 김탁구를 무너뜨리려는 의사를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 봐야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마도 신유경이 구마준에게 겁쟁이라는 류의 말을 또 다시 하게 된다면 구마준은 언제든 설빙초액을 구입하게 될 것이다.



설빙초는 외양상으로는 독초에 지나지 않지만 이를 잘 법제하면 훌륭한 약재로 쓰인다. 구마준 역시도 외양상으로는 독기를 가득 품고 까칠하게 굴지만 이를 잘 다스려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훌륭한 제빵인이 될 수도 있다. 팔봉제빵집의 1차 경합시에 시장통에서 깡패들을 만나 쫓기다가 김탁구가 스스로 끈을 풀어버리지만 나중에 뒤쫓아 온 구마준은 김탁구의 손목에 끈을 다시 묶어주게 된다. 이 때 김탁구는 구마준에게서 진심을 느끼게 되는데 김탁구는 구마준에게 '진심에서도 적당할 때 가장 좋은 향이 나는 발효냄새처럼 그런 향이 난다'고 말을 한다.

김탁구의 음용수병에 설빙초액을 투입하려고 하지만 망설이게 되고, 김탁구가 새로 사다놓은 카세트를 보면서 흔들리게 되고, 김탁구가 설빙초액을 삼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급하게 달려와 제지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게 된다. 이 사건이 구마준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것들을 보면 구마준의 진심은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는 있다. 속으로는 누구보다 나약한 겁쟁이인 구마준은 겉으로 강한 척함으로써 버텨오는 동안 그 진심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가 먹는 나물 종류 중에는 날로 먹었다가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독초인 경우도 있지만 이를 물이나 소금물에 담가서 독을 빼는 등의 방법으로 아주 훌륭한 반찬이 되기도 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발효가 중요한 소재이니 발효 얘기로 돌아가자면 발효되지 않은 설빙초의 효소는 독이 될 수 있으나 잘 발효시키면 건강식품이 되기도 하는데 발효가 잘 되기 위해서는 주변의 여러가지 환경조건이 중요하다. 구마준은 겉으론 독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변의 환경조건에 따라서는 그 독을 빼고 잘 발효되어서 훌륭한 제빵인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김탁구가 설빙초액을 삼키는 것을 구마준이 제지하지 못한 사건이 구마준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드라마에 등장했던 설빙초 사건이 구마준의 독을 빼고 잘 발효시켜서 훌륭한 제빵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더 의미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드라마 작가가 허구의 이름인 설빙초(현재까지는 허구의 이름으로 봐야 될 것 같다)를 등장시킨 것이 구마준의 진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구마준이 발효되어나가는 과정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고 싶다.

김탁구가 보리밥빵을 만들어 구마준에게 건네주며 물컵을 사용한 비밀까지 알려주자 구마준은 경쟁하는 입장이고 내가 구마준인걸 알면서 왜 이러냐고 한다. 김탁구는 도움을 준 친구이고 경합이 끝날때까지 팔봉빵집에서 같이 자고 같이 밥먹고 같이 싸우고 같이 수업받던 서태조로 대하겠다고 하자 구마준은 "서태조는 친구할 수 있는데 구마준은 안된다는거야? 그런거야?"라고 묻는다. 이 장면은 구마준이 변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설빙초 사건이 하나의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한편 20회 방송에서는 최일화씨가 등장했는데 이것은 봉빵의 말못할 사연과 관련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전 글에서 팔봉선생의 수하중에 누군가 불만을 품고 발효종에 장난을 쳤을수도 있다는 예상을 했던 적이 있는데 최일화씨와 같은 비중있는 연기자가 출연한 것을 보니 단순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증오에 가득찬 눈빛으로 돌을 든 채 팔봉제빵집을 응시하고 있는데 팔봉선생과 어떤 원한관계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인지 또는 설빙초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설빙초가 봉빵의 발효효소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는데 신빙성을 부여하기는 힘들어보인다. 이는 역사를 살펴보면 되겠는데 1965년 '순곡주 제조 금지령'이 발동되고 술을 빚는 데 있어 발효를 돕기 위해 첨가되는 누룩을 획일화하고 대량생산하며 밀주를 단속해 한 때 700여 종에 달했다는 전통주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금지령은 1980년대에 와서야 조금 완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에도 한 도에 민속주 하나씩 개발할 수 있게 했다고 할 정도였다.

팔봉선생이 만약에 봉빵의 발효효소로 설빙초를 썼다면 이것은 밀주를 만들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므로 명백한 범법행위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팔봉선생의 발효일지에는 명백히 주종(酒種)이라고 나와 있으므로 설빙초가 봉빵의 발효효소로 쓰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루트(Grut) 맥주의 경우 독초를 넣어 만들었던 때도 있다고는 하는데 봉빵에 설빙초를 혼합했다는 가정은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본다면 아무래도 무리한 가정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 외에 설빙초가 김탁구의 해열제로 쓰일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는듯한데 그것은 법제의 과정을 거쳐 독을 제거했을 때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