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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누이뎐' 천우의 트라우마가 열쇠인가?

내 예상대로 천우가 말문을 열었다. 천우가 선천적으로 언어장애를 타고난 것은 아니었고 후천적으로 어떤 계기에 의해서 받았던 트라우마로 인해 굳게 입을 닫고 살아왔던 것이다. 천우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면서 가슴 속에 꽁꽁 묻어 둔 말못할 비밀은 무엇이었고, 무엇이 천우로 하여금 가슴을 쥐어뜯으면서까지 다시 말문을 열게 만들었을까? 드라마 '여우누이뎐'에서 천우의 트라우마와 구미호에게 연이의 위험을 알려주기 위해 그것을 극복한 천우는 어떤 열쇠가 될 것인가?

천우는 연이로부터 구산댁이 돌아오지 않으니 찾아달라는 말을 듣고 바라산으로 가는 계곡으로 향한다. 한편 구미호는 만신의 부적을 이용한 퇴마사에 의해 물 속에 꼼짝없이 봉인된 상태인데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연이의 위험을 직감하고 빠져나오려고 애를 써보지만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이 봉인을 해제한 것은 구미호가 연이의 허리춤에 채워줬던 방울 달린 노리개였다. 양부인에 의해 끌려가던 연이는 까마귀들의 습격으로 간신히 도망을 가게 되는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방울 노리개를 흘리고 만다. 이 노리개를 발견한 양부인은 여종에게 물속에 던져버리라 하는데 이 노리개는 구미호에게 가라앉게 된다.

구미호는 연이가 절체절명의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필사적인 힘으로 봉인을 해제하고 물 밖으로 나온다. 이 때 구산댁을 찾고 있던 천우는 구산댁을 보고 반가움이 앞서지만 곧 구산댁이 구미호라는 것을 알고 당혹스러움에 차마 다가서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온 천우는 여전히 당혹스러운데 구산댁이 황망하게 스쳐지나가자 안채로 가 양부인과 계향의 대화를 듣게 되고 연이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천우는 구산댁이 연이가 끌려가는 서대골이 아니라 바라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급히 뒤쫓아가게 되는데 이 때 아비인 오서방과 마주치게 된다. 오서방은 또 구산댁 때문이냐고 물으며 "니 놈의 세치 혀 때문에 이 애비는 누이를 잃고 넌 에미를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같은 놈들은 알아도 모르는 척 들어도 못들은 척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나으리의 뜻을 거스르지 마라고 타이르지만 천우는 구산댁을 뒤쫓아 간다.

천우가 나룻터에 도착했지만 구산댁이 탄 배는 이미 출발한 상태인데 천우는 배를 향해 돌을 던져보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쥐어 뜯던 천우는 드디어 말문을 열어 구산댁에게 '연이는 바라산이 아니라 서대골로 갔다'고 위험을 알리게 된다. 할 말을 안으로 꽁꽁 묻고 세상을 등지고 살아오면서 말하는 법까지 잃어버렸던 천우는 그렇게 세상을 향해 다시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무엇이 이 순수하고 듬직한 사내의 말문을 닫게 만들었고 무엇이 이 사내로 하여금 다시 말문을 열게 만들었을까? 천우는 도대체 어떤 말 못할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살아 왔을까? 드라마에서 드러난 사실은 천우는 자신의 말 몇마디로 인해 어머니와 고모를 잃게 되었고 그 후부터 말문을 닫고 살아왔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사실은 누군가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서 알고도 모르는 척 하지 못했고 들어도 못들은 척 하지 못했을거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 기막힌 사연이 무엇인지 작가는 아직 힌트를 주지 않고 있다.

그 기막힌 사연에 윤두수와 조현감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정황은 있지만 단언하기는 이른 시점이다. 혹여 조현감과 관련이 있는 일인데 윤두수가 오서방과 천우를 거두어 줌으로써 조현감이 사사건건 윤두수를 어떻게든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추정을 해보게도 되고 드라마속의 인물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과 연관되었을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렇게 천우의 언행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된 오서방과 천우를 윤두수가 거두어 주었고 이로 인해 오서방은 윤두수에게 충성을 다하며 신임을 얻게 되었던 것은 맞는 것 같다.

도대체 천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직은 오리무중인데 천우는 구미호와 연이에 대한 사랑으로 오랜 트라우마를 깨고 다시 말문을 열게 된다. 천우는 두 번 다시 세상을 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스스로를 가두었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또 다시 세상을 돌아보게 되는데 이것이 드라마 '여우누이뎐'에서 향후 어떤 열쇠가 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구미호와 연이를 향한 윤두수와 천우의 사랑 그리고 연이에 대한 윤두수와 구미호의 사랑, 이들의 사랑은 다 다르다. 윤두수는 초옥에 대한 아비로서의 사랑과 연이에 대한 인간적인 도리에서 고민하는듯 하지만 지극히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다. 약초를 구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윤두수는 양부인으로부터 위험에 처했다가 자신을 믿고 품으로 들어온 연이를 안심시키고는 만신이 준 약을 넣은 약과를 먹이려 한다. 믿음을 이용해 언제든 기꺼이 뒤통수를 치는 것은 머리 검은 짐승인 인간들 뿐이다. 그러고나서 그들은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다는 이유를 만들고 그 정당성을 강변하려고 할 것이다.



연이에 대한 구미호의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이다. 자식 사랑의 크기는 인간과 미물이 그리 다르지 않으며 자식에게마저 계산적인 사랑을 하는 인간들도 많은데 인간이 아닌 짐승들의 새끼 사랑은 단순히 본능이라는 말로 평가절하하는건 인간들의 우월감과 이기심에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구미호는 윤두수와는 달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이용해 다른 생물의 새끼를 해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니 구미호의 사랑은 방어적이라면 윤두수의 사랑은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구산댁과 연이에 대한 천우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이다. 윤두수와는 달리 천우는 구미호와 연이를 아무 조건 없이 좋아하고 묵묵히 지켜주려고하며 대가를 바라지않고 베풀어주려고 하는 헌신적인 사랑이므로 천우에게 구산댁과 연이가 구미호라는 사실은 별로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천우는 자신의 어미를 죽게 만들었고 자신과 아비마저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말과 가슴을 닫아버렸던 그 말못할 위험 속으로 또 다시 자기를 던져버리려 하고 있다. 이러한 천우의 이타적인 사랑은 드라마 '여우누이뎐'에서는 어떤 열쇠가 될 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이타적인 사랑에 눈 뜬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 조현감의 외동아들로서 연이와 풋사랑을 키워가던 정규다. 몹쓸 병에 걸린 괴물이라 말하는 연이에게 괴물이라도 사랑하겠다던 정규는 자신을 구하려고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변한 연이를 보고는 줄행랑을 친다. 그러나 곧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자기가 연이에게 주었던 노리개를 남기고 떠난 연이를 뒤쫓아 간다. 연이는 과연 정규의 이러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규에 대한 연이의 사랑 또한 이타적인 사랑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드라마 '여우누이뎐', 다음 전개가 너무나도 궁금하지만 그것이 비극이라면 차라리 여기서 그냥 이대로 멈추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가슴이 아리다. '여우누이뎐'을 납량용 드라마로 분류하는 것은 넌센스이고 단순한 드라마라고 부르기엔 그 내용이 너무나도 좋다. 이런 걸작 드라마를 못 보고 지나친다면 정말 후회할지도 모른다. 특히 납량용이란 편견을 갖고 시청을 꺼려했던 분들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명작 드라마가 바로 '여우누이뎐'이다.



한편 드라마 '여우누이뎐'에서는 숨겨진 입춘축을 찾아보는 또 다른 재미가 숨어 있다. 별도의 글을 쓰려고도 했으나 여기에 조금만 끼워넣어 본다. 입춘축(立春祝)은 입춘날 봄이 온 것을 기리어 축하하거나 기원하는 내용을 적은 글이다. 입춘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이자 봄을 맞는 날이므로 이날 봄의 형상에 적합한 축하, 기원, 경계 등의 글을 쓰는데, 이것을 말한다. 입춘축은 입춘첩(立春帖), 춘첩(春帖), 춘첩자(春帖子), 입춘방(立春榜), 춘방(春榜), 문첩(門帖)이라 하는데 이는 종이를 잘라 좋은 글을 쓰고 입춘일에 각 집마다 대문이나 기둥 등에 붙인다는 의미다.

위 이미지에는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란 입춘축이 문 양쪽에 붙여져 있으며 문설주들에도 많이 붙여져 있는데 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 춘만건곤복만가(春萬乾坤福滿家)도 보였다. 이처럼 입춘축은 대구의 글을 지어 붙였는데 그래서 춘련(春聯), 대련(對聯), 문대(門對)라고도 부른다. 위에서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는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이고 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 춘만건곤복만가(春萬乾坤福滿家)는 '하늘은 세월을  더하고 사람은 수명을 더하고 천지간에 봄이 가득하고 집에도 복이 가득하다'는 의미다. 예전에 어릴 때 백부님 댁에 가면 입춘축이 많이 붙여져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뭔지도 모르고 그저 글씨 잘썼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흥부집 기둥에 입춘방(立春榜)'이란 속담을 소개해 본다. 가난하고 자식도 많은 흥부네 비좁은 집 기둥에 이런 거창한 문구의 입춘축을 붙여 놓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빗대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 자식을 살리겠다고 다른 생명을 죽이려하는 윤두수네 고대광실에 붙여져 있는 저 거창한 입춘축들은 과연 격에 맞는지 의문이다.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빗대는 말은 물질적인 풍요로 따지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으로 보아 '흥부집'이 아닌 '놀부집 기둥에 입춘방(立春榜)'이어야 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