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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킥' 엔딩은 고려대 자퇴녀의 메시지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어요. 근데 언젠가 이런 생각했어요. 내가 그 사다리를 죽기살기로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결국 못 올라 갈 사람의 변명이죠.' 세경은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지훈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세경의 이 말은 지난 3월 10일 고려대 교정에 대자보를 붙이고 자퇴를 선언한 김예슬양이 떠오르게 한다.

세경은 그동안 혼자서 속으로 삭이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감정과 생각을 처음으로 표현했다. 그렇게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처음으로 마음껏 하고 난 세경은 행복하다고 했다. 그 행복한 순간에 세경은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세경의 소원대로 시간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김예슬양도 처음으로 자기의 생각을 밝혔을 것이다.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주위에도 얘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배부른 투정이나 어리석은 얘기 정도로만 여겼을 것이고, 몇 번이나 속으로 삼키다가 그렇게 대자보를 썼을 것이다. 그렇기에 김예슬양의 대자보를 읽으면 김예슬양이 토해내는 사자후(獅子吼) 같다. 김예슬양도 처음으로 자기의 생각을 밝히고 자신의 의지대로 실행에 옮기던 그 때 홀가분하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멈추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예슬양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부닥쳐야 할 녹록지 않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게 세경과는 다르다.


(오마이뉴스 사진 인용)

세월이 흘러 3년 후, 소위 88만원 세대로 그려지던 정음은 취직한 회사의 부팀장이 되었고 준혁은 소원하던 서울대(서운대는 아닐 것 같아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에 진학해 대학생이 되었다. 그들은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죽기살기로 애썼을 것이다. 그 댓가로 그들은 88만원 세대나 서운대라는 구박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각자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을 잃었다. 신분의 사다리를 죽기살기로 올라 간 정음과 준혁은 행복할까?

세경과 김예슬양은 drop out (of something)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경은 기성 체제를 거부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데 반해 김예슬양은 기성 체제를 거부하고 스스로 빠져 나갔다는 차이점이 있다. 세경은 어쩔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결정이었다면 김예슬양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황과 현실의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결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나타난다. 세경이 자기의 현실을 거부하고 그 환경에서 자기의 의지대로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죽음밖에는 없지만 김예슬양에게는 자기의 의지대로 살아 갈 또 다른 기회가 있다. 이것이 세경과 김예슬양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세경이 현실에서 벗어나 타히티로 가는 것이나 김예슬양이 대학을 자퇴하는 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선택을 하는게 옳은가는 결국 각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작가가 마지막회에서 세경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세경의 소원대로 시간을 멈추어 놓은 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답을 밝히기보다는 시청자들의 선택에 맡겨 놓는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세경이 마지막에 지훈에게 했던 말들은 구구절절(句句節節)마다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 작가가 김예슬양이나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전해주고 싶어하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의 끝이 그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다는걸 깨달았거든요. 그래도 떠나기로 하곤 좀 힘들긴 했어요. 아저씨랑 막상 헤어지면 보고 싶어 못 견딜 것 같아서. 그래도 마지막에 이런 순간이 오네요. 아저씨한테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들 꼭 마음껏 하고 싶었는데 이루어져서 행복해요. 앞으로 어떤 시간들이 기다릴지 모르겠지만 늘 지금 이 순간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나는 시간이 멈춰 버린 세경의 생사를 따져보고 싶지는 않다. 단지 세경이 가장 행복해했던 그 순간에 시간이 멈춰서 다행스럽고 그래서 그 순간만을 기억하기로 한다. 또한 김예슬양이 앞으로 어떤 인생길을 걸어가게 될 지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세경이나 김예슬양 모두 "앞으로 어떤 시간들이 기다릴지 모르겠지만 늘 지금 이 순간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시트콤은 끝이 났지만 남겨진 우리는 또 길지도 않은 3년 후, 어떤 소중한 것을 내려놓고 신분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고 애쓰고 있을까? 결국은 쳇바퀴이고 '트랙'일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