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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보기/엔터테인먼트

'지붕뚫고 하이킥'은 인간의 이중성을 조롱한다

사람들은 TV 연속극에 나오는 주인공이 불쌍한 처지에 처하게 되면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며 눈물 흘리지만 자기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비록 TV 연속극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지언정 자기 자신은 절대 약자를 괴롭히는 TV 연속극 속에나 존재하는 그런 악당은 아니라고 한다. 어쩌면 자기 자신이 TV 연속극 속에 존재하는 악당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지난주에 TV를 보면서 '쟤들 불쌍해서 어떡하냐'며 눈물 흘리던 순재와 보석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자기 집에 식모살이하는 불쌍한 현실속의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그들을 심하게 부려먹고 사사건건 구박하고 괴롭히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TV를 보면서는 기꺼이 눈물을 흘린다. 특히 보석이 흘린 눈물이야말로 정말 잔인한 양면적인 인간의 눈물인 것이다. 잔인함을 내면 깊숙히 간직하고 우아한 미소로 치장한 채 기꺼이 악어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허상을 작가는 보석에게 투영시켜 놓았다.



이 시트콤에서 세경은 참 운좋게도 편한 식모살이를 하고 있다. 비록 순재네 식구들의 옷방으로 쓰는 곳이기는 하지만 세경은 신애와 헤어지지 않고 발 뻗고 누울 따뜻한 방이 있다. 해리가 사사건건 괴롭힌다지만 철없는 어린아이의 투정일 뿐이고, 집안의 어른인 순재와 현경은 세경을 믿고 집안일을 맡겨두고 있고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 준혁은 세경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세경의 일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기도 하며 지훈 역시 세경에게 세심한 배려를 해 준다. 이렇게 편한 식모살이를 하는 세경은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세경을 정말 불편하게 하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보석이다. 보석은 사소한 트집이나 잡고 잔소리를 하기 일쑤이며 큰소리를 치면서 억압하고 무시하기까지 한다. 보석의 이러한 행태들은 현경이 해야 될 몫이지 보석이 할만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석의 캐릭터를 말한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하며 소심한 소시민적 캐릭터란다. 그리고는 세경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거나 심지어는 전혀 상처입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그래서 보석이 이해가 된단다.

그런데 세경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을까? 신세경의 연기력이 아직은 부족해서 그렇게 보인다고 하기도 어려운게 내 눈엔 세경이 혼자 참고 또 참으며 속으로 혼자서 삭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차마 대놓고 항변하지 못하는 세경의 딱한 처지가 느껴진다. 세경의 희미한 미소는 그래서 내 눈엔 더 슬프고 가슴이 아리기만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런 세경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고 오히려 보석의 소심한 소시민적 캐릭터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일까?



이해해야 될 것은 작가의 의도이지 보석의 캐릭터가 아니다. 보석의 터무니없는 상황 설정은 캐릭터와는 무관한 것 같다. 이름도 없이 그저 '우리 계집애, 그 계집애, 그 년' 등으로 불릴 뿐이었으며 그나마 '식모애' 정도는 양호한 호칭이었던 절대적 약자를 추악하게 유린했던 못난 남자들의 초상을 시트콤속에서는 보석으로 대변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기에 어렵고 특히 시트콤에 어울리지 않는 상황을 설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억지스런 상황을 설정하고 보석의 언행을 통해 얘기를 풀어가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이 정신적인 고통이다.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서 식모살이하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또래 아이들이 교복 입고 학교가는 것을 본다면 학교가는 또래 아이들이 부럽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딱한 처지가 혹시라도 또래 아이들에게 들킬까봐 먼저 숨어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 때 느껴야 할 그 좌절감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식모살이하는 집주인이 자기를 믿지 못하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간섭한다면 집안일 하느라 힘든 몸뚱아리보다도 훨씬 더 괴롭고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지훈은 세경의 처지를 동정하고 연민을 가져서 세경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지훈의 그런 선의의 도움이 오히려 세경에겐 상처가 된다. 물론 의도하지 않은 상처이나 지훈은 세경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 지훈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고 배려이지만 그것을 받는 세경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 것들일수도 있다. 그런데 지훈은 이러한 세경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하며 과민해보이는 세경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인다. 때로는 의도한 상처보다 의도하지 않은 상처가 더 큰 생채기를 남기기도 한다는 것을 지훈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현대인들의 이중성의 상당부분은 포장되어지고 강요되어지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데 있다. 다양한 미디어매체를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되므로 현대인들은 자신이 본 미디어매체를 통해 포장된 어떤 것을 보고 선입견을 갖게 되고 그것은 곧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고 편견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포장된 틀의 범위내에서만 어떤 사물을 보게 되고 그에 대한 가치평가나 판단기준 또한 포장된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다. 그래서 이미 자기가 갖게 된 포장된 선입견의 틀을 벗어나거나 자신의 그것과 다르면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 한다.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은 여타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어느 한쪽을 포장하거나 강요하는 대신에 사람들의 이중적인 시선을 다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이러한 이중성을 통렬하게 조롱하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편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통쾌하게도 만드는 이 시트콤은 그래서 두 배의 재미를 준다.